치앙마이 반달살기 일지 (1)

2025. 03. 03부터 2025. 03. 05까지

by 양양

<2025. 03. 03>


치앙마이로 반 달 살기 떠나는 날. 이상하게 설렘도 두려움도 없다. 일부러 어떠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2주 동안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조바심 내지 않으며 마음껏 쉬고 오고 싶다. 여행이 끝나면 막연한 현실이 나를 기다릴 것이란 생각에 너무 무섭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천천히 움직이고 나를 정리해야겠다.


제대로 살고 싶다. 솔직히 제대로 사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냥 막연히 그런 마음이다. 건강한 정신과 몸? 삶을 느낄 줄 아는 것? 만족스러운 나의 상태?

천천히 가더라도 더 온전하고 나은 내가 되고 싶다.

그동안 나의 나쁜 습관과 무수한 실패, 쪽팔림 들은 더 이상 내 꼬리표가 될 수 없다. 나는 분명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도망치듯 떠나는 치앙마이에서 여유와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2025. 03. 04>


본격적인 치앙마이 여행 첫날.

첫인상이 꽤 마음에 든다.

너무 소란스럽지도 않고,

곳곳에 예쁜 가게들과 골목들이 줄지어 있다.

그냥 걷기만 해도 좋은 거지.

숙소 앞 골목길

아침으로는 <쿤캐쥬스바>에 가서 아사이볼을 먹었다. 한국에서는 만 원이 훌쩍 넘는데

여기에서는 3800원 정도의 가격으로 맛볼 수 있다.

정말 말도 안 된다.

곳곳에 예쁘게 피어있던 꽃

<딥디바인더>라는 소품샵에서

귀여운 태국 스티커도 사고,

저녁에 받을 마사지 샵도 미리 예약했다.

태국의 사찰들도 조용히 구경했는데,

참 경건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걷고.. 또 걷고.. 또 걸어서 와로롯 시장까지 걸었는데 한국의 동대문과 비슷하다.

베트남의 한 시장과도 흡사하고.

이곳에서 팟타이도 맛있게 먹고

식후 커피도 한 잔 했다.

귀여운 토끼 캐릭터로 가득한 카페다.

팟타이 맛집

소품샵들을 구경하고,

<lost book shop>이라는 서점도 가보았다.

맨 발에 샌들을 신는 바람에 벌써 발이 다 까지고

엄청난 더위에도 지쳐 마사지를 받으러 가기 전

숙소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몸이 아른아른 거린다.

이따 마사지받으면 훨씬 낫겠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고민이다.

행복한 고민! 가보고 싶은 맛집도 한가득.

카페도, 재즈바도!

천천히 다 정복하고 갈 테다.

타페게이트. 비둘기가 많다


<2025. 03. 05>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어제 먹은 게 탈이 난 걸까?

배도 아프고 잠도 설치는 바람에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

게다가 발까지 까져서...

걸을 때마다 고통이다.

낯선 영역에 들어서면 늘 이런 식이다.

내가 무던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온갖 예민함을 견디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참 괴롭다


그래도 아침에 그래프 카페 오픈런 성공!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도착해서

한적한 커피 타임을 즐길 수 있다.

일명 숯 커피라고 불리는 ' monochrome'을 마시는데흑임자 라떼와 비슷한 맛이 난다.


아까 새벽에 너무 배가 고파서

어제 사둔 망고 스티키 라이스도 먹었는데,

냉장고에 넣어둔 게 실수였다.

밥이 딱딱하게 다 굳어 버리는 바람에

다 먹지도 못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시도해 봐야지.

오늘도 역시 급하지 않고,

충실히 순간순간을 누리며 치앙마이를 느껴보자.

그래프카페


모닝커피를 마시고

<phith>라는 식당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돼지고기 바질 볶음밥과 갈비국수.

슬로우 푸드를 지향하는 곳이라

왠지 나까지 덩달아 음식을 음미하게 된다.

정성이 가득한 정갈한 음식이 마음에 든다.

다정한 사장님 부부


원래 가려던 <kalm village>가 문을 닫아서

계획이 틀어졌다.

일단 <캐롯 커피>에 가서 할 일들을 좀 하고,

사원 구경을 가야겠다.


그런데 카페에서 아주 가혹한 현실과 마주해 버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내 삶을 꾸려가야 하는지

감도 오지를 않고,

내가 얼마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인지만 느끼게 된다. 세상에 내가 들어갈 퍼즐 조각이 남아있기는 한 걸까? 무섭고 막연해진다.

캐롯커피
고민이 많았다


사원을 둘러보고, 공원도 갔다.

특히 공원은 사람들의 활기를 느낄 수 있어 참 좋았다. 더 앉아있고 싶었는데 벌레의 습격으로

얼른 자리를 옮겼다.

야식장도 아직 열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이미 문을 닫아버린 건지

비둘기들만 바글거려서 또 도망갔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걸었다.

해 질 무렵 간 <왓 쩨디 루앙>은 정말 아름다웠다.

거대했고..

그런데 오늘 하필 민소매를 입은 바람에

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사원에서는 민소매를 입을 수 없다.

치앙마이의 노을
왓쩨디루앙

이렇게 많이 돌아다녔는데도

시간이 오후 6시 30분밖에 되지 않아

어쩌지 고민하다가 재즈바에 가보기로 했다.

혼자 가는 게 좀 낯설기도 하지만..

일단 가보는 거지 뭐!


목테일 하나 시켜놓고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 자체로도 너무 기대되고, 시원하고, 편안하다.

다들 본업이 따로 있으시다. 엔지니어, 선생님….


**

서희야. 진짜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었니? 이제는 더 이상 학생이라는 정체성이 너를 보호해주지도 않고, 가족이나 친구가 삶을 책임져주지도 않을 거야. 앞으로 넌 지금은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실패와 좌절과 쪽팔림을 경험하게 될 거야. 그리고 슬프게도 네 삶은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 있어. 늘 이렇게 찌질하거나 혹은 꿈을 포기하게 되거나 생각보다 별 것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몰라.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느냐야. 그 슬픔 안에서도 내가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면, 후회 없이 제대로 충실했다면 적어도 부끄럽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주로 못나고 한심하고 찌질하지만 나만 가진 좋은 점도 분명 있어. 그걸 잊지 마!


네 삶이 어떤 형태가 될지 몰라 무섭고 두렵지만 마음을 늘 현재에 두고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