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과거의 오늘’ 10년 전 사진은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 사진이었다.
스페인으로 놀러 온 친구와 함께 했던 여행이었다. 스페인 살이가 2년쯤 되었을 때였고 굳이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낯선 곳으로 우리는 여행을 떠나 새해를 맞았다. 사막에 머문 시간보다 이동했던 시간이 더 길었고, 겨우 해질 무렵쯤 도착한 사막 언저리, 예정보다 좀 늦게 도착한 탓에 사막 안으로 이동할 때 타고 갈 낙타가 부족하다고 했다. 몇 여행자들은 다른 여행자를 데려다주고 돌아오고 있는 낙타를 맞이하러 사막 가운데까지 차량으로 이동을 해야 했는데 여행자들은 쉬이 양보하지 않았다. 오는 길이 피곤하기도 했고, 굳이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가야 할까. 싶었던 나와 친구(다행히 의견이 일치했다), 그리고 두 명의 다른 외국 친구들이 지프차에 올랐다. 그때까지 내가 가본 사막은 우유니 소금사막과 그 언저리의 황량한 땅이 전부여서 사막하면 떠오르는 황톳빛 모래언덕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프차는 언덕을 넘고 넘어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는 듯 달렸다. 그리고 사막 어디 즈음 그 험난한 질주는 멈췄다. 조금만 기다리면 곧 낙타가 올 거라며 지프차 운전사는 미리 마을로 떠나고 어둠이 내리는 사막에 가운데 버려진(?) 우리는 덩그러니 앉아 ‘사막에서 낙타를 기다렸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무것도 없는 사막 한가운데의 막연함과 막막함이 느껴졌다. 왁자지껄 여행객들로 붐비던 시간을 벗어나 오롯이 ‘사막 같은’ 시간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텅 비어 있어 충만하구나. 그제야 법정 스님 ‘텅 빈 충만’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새해를 맞이하기에 참 좋은 순간이네”
그것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장소와 순간, 그것과 마주하는 새로운 해의 궁합을 예찬하는 말이었다.
낯선 것은 새로운 것.
나에게는 동의어 아닌 동의어였다.
2010년 호랑이해에 호랑이 기운을 외치며 호기롭게 스페인으로 떠난 이후 한동안 그렇게 나는 새해를 매년 낯선 다른 땅에서 보냈다.
모로코의 사하라 사막도 그랬고, 포르투갈 파두 쇼를 보면서, 터키의 블루모스크 마당에서 스케치를 하면서, 로마의 바티칸 대성당 마당에서, 영국의 테이트 모던 전시장에서, 비엔나의 친구 집 옥상에서.
글자로 나열하고 있으니 나조차도 내가 부러워지는 그런 정말 운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
꽤 오랫동안 나에게 새해는 극도로 낯선 시간, 그야말로 ‘새’ 로운 시간이 되어야 하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아마 공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새로운 해라고 하여 완전히 비어있는 달력인 적은 없었다. 대부분 바로 며칠의 휴일을 빼면 바로 1년 스케줄이 빼곡하게 채워지고, 그러다 보니 서둘러 1년 치 휴일이 언젠가 체크를 하며 그나마 빈 공간마저 계획들로 채워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시간을 지나 그야말로 백지로부터 시작하는 새해를 맞이한 지도 꽤 시간이 되었다. 낯선 장소는 채워지지 않은 텅 비어있는 시간에 든든한 지원군 같은 것이었다. 막연함과 막막함은 낯선 장소와 만나면서 낯선 설렘으로 잘 포장되어 되살아났다. 괜찮았다. 아주 근사했다.
오랜만에 SNS에 올라온 그 낯설던 순간, 그래서 새롭다고 느꼈던 순간을 보며 그 안에 숨어있던 아득한 막연함을 바라본다. 여전히 새해가 되면 무엇으로 채워질지 모를 깨끗한 달력을 마주하지만 이제 나는 굳이 낯설게 그 앞에 서지는 않는다. 익숙한 공간 뻔한 루틴, 뭐 좀 더하자면 약간의 부지런 정도를 장착하고 태연한 듯 그런 시작을 한다.
해가 서서히 지며 그림자가 드리우는 사막 가운데 앉아 ‘이렇게나 낯선 곳에서 이토록이나 빛나는 나의 막막함이여’와 같은 그럴싸한 낭만을 예찬하는 문장이 없는 시작이라고 설레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김연수의 소설을 빌려 말하자면
'미에서 솔 정도의' 변화를 그려보는 설렘 정도를 가지고 나는 새해 앞에 낯설지 않게 서서, 하지만 또 그 시간을 어느 때보다 낯설게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