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같이 ‘밥’한 끼 먹자
작년 겨울 같은 동네로 이사 온 지인과 밥 한 끼 먹자고 한 것이 몇 달 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코로나 이슈에 서로 조심조심하느라 선뜻 오란 말도 가겠다는 말도 못 하고 시간만 보내다가 드디어 날을 잡았다. 주말 점심 한 끼를 같이 하자 했으나 워낙 요리에 취미가 없는 나인지라 뭘 준비하나 막막. 게다가 고기를 먹지 않는 친구라 메뉴가 더 어려웠다.
요리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잘하지도 않으면서 ‘밥 먹으러 와’ 이런 초대를 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의 공간에서 한 끼를 공유하는 것은 밖에서 만나서 밥 한 끼를 먹는 것과는 또 다르게 시간을 기억하게 하기 때문인 듯하다.
자취를 하던 대학 시절, 어느 여름방학 유난히 장마가 길었던 때, 반 지하였던 자취방은 유난히 습하고 어두웠었다. 다소 무료하고 20대의 괜한 심각함에 취해있던 그 여름, 나는 요리를 했다. 요즘처럼 인터넷 검색하면 레시피가 나오던 시절은 아니어서 집에 돌아오는 길 서점에 들러 요리책을 보고 그날 해 먹고 싶은 요리 재료와 방법을 대충 메모하고 장을 봐와서 만들어 보곤 했다. 요리가 맛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꽤 그럴듯했다. 그렇게 하나 둘 익힌 요리를 가끔 친구들을 불러 같이 먹곤 했다. 밥 먹자고 만난 시간은 자연스럽게 긴 수다의 시간으로 이어졌고, 그런 시간이 쌓이며 유난히 다운되어 있던 그 여름의 시간은 그렇게 조금씩 장마를 벗어났다.
밤기차를 타고 해남 땅 끝 마을까지 바다를 보러 갔던 친구와의 여행길도 기억난다. 현금을 별로 들고 가지 않았던 둘 다 지방은행에서 카드 현금인출이 안 되어서 얼마 남지 않은 현금으로 하루 종일 쫄쫄 굶었다. 바다를 본건지 아닌지 배고픈 기억만을 안고 다시 밤 기차로 새벽에 역에 도착하자마자 친구와 바로 나의 자취방에 가서 같이 김치찌개를 끓여 허겁지겁 먹었다. 여행길에서 보다 더 따듯하게, 배부르게 길게 우리의 여행은 그 공간과 김치찌개로 다시 시작되었다.
“네가 그때 끓여준 김치찌개 정말 맛있었는데”
“그땐 배가 고파서 뭘 먹어도 맛있었겠지.”
이제는 어디서 밥 굶을 일은 없는,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조금은 재미없어진 어른인 우리는 아직도 가끔 만나면 그때의 이야기하곤 한다. 김치찌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어느 시간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특별한 이벤트가 없이는 '그저 밥 한 끼하자'고 누군가의 집으로 초대되기도, 초대하기도 점점 어려워진다. 습습한 반 지하 자취방이어도 상관없던, 그냥 끓여낸 김치찌개여도 상관없던 그런 시간과 마음에 점점 쓸데없는 체면들이 쌓이고 효율적 시간에 대한 계산이 많아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너에 대한 내 마음이 낯설지 않음은
내가 아플 때 네 자취방에 끌고 가서 챙겨준
따듯했던 차가 같이 생각나기 때문이야"
오랜만에 SNS에 댓글을 남긴 고등학교 친구의 기억이 담긴 글을 보며 다시 한번 공간으로 초대하여 무언가를 나누는 기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공간으로의 초대는 그렇게 조금 더 진하고 깊은 시간을 남겨주는 구나. 싶다.
동네 지인과의 밥상은 한없이 단조로웠다. 그나마 아버지께서 동해 앞바다에서 잡아서 보내준 농어가 없었다면 허전할 뻔했다. 하지만 소박한 점심 한 끼로 시작된 시간은 중간에 수다 떨다 출출해 다시 시작된 김치전에 맥주타임으로 이어지며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서로의 집이 걸어서 5분 거리니 부담도 없어 좋았다. 이유와 목적이 정해지지 않은 이런저런 두서없이 이야기 속에 새로운 서로의 이야기들도 만났다. 그렇게 또 밥 한 끼의 시간이 쌓였다. 그리고 어느 맛집에서 먹은 한 끼보다 든든한 마음을 챙겼다.
“언제 그냥 편하게 너네 집에 가서 딩굴딩굴 놀다 오면 좋겠다.”
얼마전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가 말한다.
네 공간에서 밥 한 끼 해도 될까?
그 말은 잠깐이지만 너의 공간과 시간 안에서 온전히 우리가 만날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래서 나는 대답한다.
“와. 언제든. 와서 같이 밥 먹고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