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거의 20여년 만에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나의 첫 차는 주 6일 시대에 주말마다 여행 다니던 나를 위해 직장 어르신이 폐차하기는 아쉽다며 연습용으로라도 쓰라고 후원해주신 수동 티코였다. 차를 받을 때만 해도 곧 티코 끌고 여기저기 더 자유롭게 여행 다닐거라 꿈꾸었지만 수동 차량의 운전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고 몇몇 안좋은 트라우마만 남긴 채 6개월이 채 안되어 운전포기. 당시 차량이 필요하던 언니 사무실에 기증하여 그 덕에 언니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운전을 할 생각도 안했는데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코로나 시기와 과연 계속 서울에서 살아야할까라는 탈 서울의 필요를 느끼게 되면서 접어 두었던 운전의 필요 역시 슬슬 올라왔고. 그 때 마침 지인의 경차가 내 손에 들어왔다. 막상 차를 인수받고 나니 걱정이 한 다발. 일 년 전 쯤 다시 언니네 차로 다시 운전 해보겠다고 연수를 받긴 했지만 혼자 운전하긴 아직 부담이 되었다. 결국 친구에게 열 번 정도 만 같이 나가 달라 부탁하고 매일 운전 연습 중이다. 부부사이에도 안 한다는 운전연수인데 친구가 무슨 죄인가싶지만 이번에는 꼭 운전자가 되리라는 의지가 앞서 어려운 부탁을 했다.
매일을 두 시간 정도 긴장하며 운전하다보니 일상의 리듬이 많이 흔들린다. 좋아하는 일이 아닌 부담되는 일이 매일매일 시간표의 첫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분이 어떤 것일지 알 것이다. 뭔가 쑥쑥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고 매일의 변수가 새롭게 생기니 한숨으로 시작해서 한숨으로 끝나는 운전은 그렇게 하루를 지배한다.
“뭐든 처음하는 것은 다 두렵지. 근데 처음이라는 설레임이 더 크면 두려워도 하는 거야.”
익숙하지 않은 것은 두렵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시작의 설레임이 두려움을 앞설 때 무언가를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 지면 두려움도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운전이란 아이는 이미 시작의 설레임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아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니 언제나 시작이 두렵고 오히려 증폭되기도 한다. 익숙함을 위해 쌓아야하는 시간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찾아낸 처방은 ‘당연함’이다.
왜 이렇게 못하지. 왜 어렵지. 왜 안 늘지. 라는 자책의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고 처음인데 무서운 건 당연하지. 처음인데 실수하는 건 당연하지. 처음인데 못하는 건 당연하지. 라며 나의 자리를 인정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운전을 하다보면 살아가는 일과 참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조금은 먼 시선 처리라던가, 다른 차량의 속도와 흐름에 맞추어 가는 것, 때로는 다른 차량의 흐름에 동요되지 않고 나의 차선을 잘 지켜가야 하는 것, 미리 신호를 보고 준비하는 마음이라거나 돌발상황에 나를 방어하는 방어운전이라거나. 이런 행위들은 삶을 살아가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듯하다.
그러니 사는 일도 언제나 익숙하지 않고 어렵다. 운전경력에 비하면 몇 십 배는 더 많은 삶의 경력에도 여전히 하루하루의 시작이 두렵고 실수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노선을 매일매일 마주서는데 이제 고작 열흘 정도 운전을 하며 그게 어렵다고 절망할 일인가. 그래도 사는 일에 비해 운전은 차선도 있고, 신호도 미리 볼 수 있고, 규정 속도도 정해져 있으니 다행 아닌가. 그렇게 위로한다.
하루는 한강 노을보기를 목표로, 하루는 파주 맛 집 투어를 목표로, 어떻게든 즐거운 이유와 핑계를 이리저리 만들어 오늘도 운전대를 떨리는 마음으로 잡는다. 쿵쾅이던 마음은 일단 도로로 진입을 하면 ‘일단 고’이기에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한다. 일상을 흔들고 있는 이런 날이 쌓이다 보면 흔들리는 와중에 또 균형을 맞추어 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운전대를 잡는 마음이 가벼워지고 그만큼 나의 지도도 좀 넓어져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상이 잘 되지 않지만 그만두지 않으면 되어가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믿어 본다.
“운전 별거 아니야. 자전거 타는 거 하고 똑같아.”
운전하는 친구들의 말이 지금은 야속하게만 들리지만 곧 나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그런 건방진 멘트를 하고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