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번째 언어- 스페인어로 살다 #14
스페인에는 외국인을 부르는 말로 ‘guiri기리'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으로 쓰는 ’extranjero 엑스트란헤로 (외국인)‘과는 약간 다른 단어이다. 그 기원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명확치 않은데 예전에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약간의 얕보는 뉘앙스를 담아 사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일상적인 외국인을 칭하는 언어로 쓰인다.
세비야에서의 삶이 길어지면서 나는 이곳에 잘 정착해 사는 외국인 들, 즉 기리들은 어떤 마음으로 다른 땅에 다시 자신의 삶을 꾸려간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들을 만나 종종 인터뷰 아닌 인터뷰를 하곤 했다.
첫 인터뷰의 주인공은 세비야의 유명한 ‘아니마(anima)’라는 갤러리 바를 운영하고 있는 피터였다. 바에 단골이던 나는 이미 그와 친분이 있었다. 어느 날 피터가 주로 아침을 먹는다는 카페에서 약속을 했는데 시간에 맞춰 도착해보니 피터는 이미 아침 식사를 마치고 여유롭게 신문을 보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과 약속을 하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이래서 우리는 '기리'구나.’
그는 오스트리아인이다. 오스트리아의 티롤 지방이 고향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독일 등 국경지대에 있는 곳인데 경계에서 살았던 경험이 그가 경계를 넘나들며 사는 것을 쉬이 허락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독일에서 건축 일을 하다가 점점 일만 하는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일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맘에 맞는 동료들과 문화단체를 만들어 지역 예술 문화 프로젝트를 했다. 그 당시가 1979년도였다고 하니, 그 실험이 얼마나 새로운 것이었을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세비야는 가끔 짧게 여행했던 곳이었는데, 느낌이 좋더라고. 그래서 한 번 살아보자 했지. 사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이곳에 살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세비야로 온 해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지금의 건물을 사서 갤러리 바를 열었다. 스페인어도 서툰 외국인이 그 당시만 해도 이 지역에서 낯설고 새로운 공간을 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렀다.
"장소라는 것이 그렇지. 순간 왠지 친숙한 곳이 있잖아. 그러나 또 문득 낯설어지지. 착각 같은 거야. 공간으로서의 장소는 그렇게 항상 착각하고 변해. 그래서 중요한 것은 어느 장소에 있는가가 아닌 '어떤 삶의 공기' 안에 있는가라고 생각해. 나에게 맞는 공기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어느 장소에 있던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지. 그제야 비로소 “La vida es un viaje 라 비다 에스 운 비아헤 (삶은 여행)이 되지."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피터의 오랜 친구가 말했다.
“헤이 피터! 거기 기리들끼리 아침 먹고 있네”
30여 년을 살아도 여전히 그는 이곳의 기리였다. 거보란 듯이 나에게 슬쩍 눈짓을 하는 이제는 일흔이 넘은 그를 보며 마침내 “La vida es un viaje(삶은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가 찾은 삶의 공기는 무엇인지 문득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