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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하 Aug 28. 2020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할 때

-2010년 여름, 호랭이쇼를 기억하며.

그 시작은 이랬다.


벌써 10년 전인 2010년. 10여 년 간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스페인으로 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부럽다"였다. 하지만 정말 부러울까. 나 스스로도 적지 않은 나이에 삶의 터를 잠시 옮기는 결정에 문득문득 의심이 싹트고 확신이 없었는데 말이다.

“송별회 하자!” 길래 “무슨 송별회야. 아주 가는 것도 아닌데...” 하다가 그래도 이 기회에 여러 이유로 쉽게 보지 못하는 친구들의 안부들을 물어보고도 싶었다. 삼삼오오 따로따로 만나 그냥 술 마시고 밥 먹고 수다 떠는 거 말고 좀 다르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나의 겉만 거창한 인생 2 시즌 이야기를 나눈다는 핑계로 친구들의 현재 이야기도 들어보면 좋을 듯했다.


37.5도의 이야기


모임을 하기로 마음먹고, 모임에서 함께 볼 영상 하나를 만들기로 했다. 20대 어느 시간에  꿈꾸던 다큐멘터리 감독의 꿈을 끄집어내어 퇴사 후 출국까지 좀 여유 있는 시간 동안 몇몇 친구들을 찾아 만났다. 모두 ‘그녀들’이었다. 카메라를 가운데 두고 나누는 대화는 다소 진지한 우리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그렇게 친구들의 삶이 말들로 모였다.


2010년 여름, 나와 친구들은 37살의 가운데, 37.5 정도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육아에 정신이 없었고,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회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건너고 있기도 했다. 그 시간 안에서 익숙해진 것이 있었고, 잊어버린 것, 잃어버린 것도 있었으며, 또 여전히 남은 숙제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대하는 태도에는 저마다 어느 철학서의 밑줄 못지않은 그녀들만의 한 문장들이 있었다.

문득 지금 우리는 36.5도 체온보다 1도 높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미부여가 되었고, 그 1도만큼의 온도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온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짧은 영상 제목은 ‘37.5도의 이야기’가 되었다. 


74년 생 호랭이들의 이야기


모임의 이름이 ‘호랭이 쇼’가 된 것은 2010년이 우리 띠인 호랑이 해였기 때문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 호랑이 띠인 친구들과 그렇지 않은 친구들까지,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한 명 한 명 을 직접 초대를 했다. 나에게는 모두 ‘지인’이었지만 그들끼리는 서로 낯설기도 한 모임은 그 당시 그렇게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우리끼리 보자’며 주춤하기도 했지만 모임날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이 홍대의 한 공간으로 찾아와 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좀 더 집중해서 고민하는 때가 아닐까"
 "내가 나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필요하지"
"닭살 돋게 살고 싶은데, 나를 닭살 돋게 하는 건 뭘까"
"무언가 되기 위 해 사는 게 아니라 살면서 무언가 되어가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는 쫓겨 왔다면, 이제는 끌려갈 거 같아.
그러니 지금 잠시 잘 멈출 순 없을까. “


말하고 들으며 이야기가 쌓이고 누군가의 송별회가 아닌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우리들의 무대가 되어가는 시간이 조금은 벅찼다.


“라떼” 말고 “나”


작년 나의 공간 ‘정거장’에서 ‘니니쇼’를 했다. ‘니니nini’는 스페인어로 ‘백수’를 표현하는 말이다. 유난히 니니들이 많이 오고 가는 정거장이기에 농담처럼 같이 모여 수다 잔치를 벌이면 재미있겠다 했는데 정말 10년 전 ‘호랭이쇼’만큼이나 즉흥적으로 수다판이 벌어졌다. 20대에서 40대까지 다양한 이력과 삶의 자리를 가진 니니들이 모여 자기소개를 하는 데만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요즘 흔히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라는 문장은 점점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곤 하는데 사실 과거가 쌓이지 않은 ‘나’가 어디 있을까. 이 과거가 듣기 싫은 누군가의 ‘라떼’가 아닌 그로 인해 흥미로운 현재의 어떤 ‘나’를 만나는 시간이라면 이렇게 신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날 나는 10년 전 호랭이쇼를 다시 만나는 듯했다.


호랭이쇼를 마치며 모두들 스페인에서 돌아오면 ‘호랭이쇼 2탄’을 하자고 했는데 벌써 돌아온 지 5년이 되어가고 아직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다시 호랭이쇼 2탄을 하게 된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본격 ‘라떼 쇼’를 해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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