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수업 4강
한국에서 처음 스페인어 학원을 다닐 때 자기소개를 하며 스페인어 이름을 지어야 했다. 영어 학원을 다닐 때도 역시 그런 미션이 있었던 것 같은데 굳이 자기소개를 다른 영어 이름으로 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지만 아마도 한국어 발음이 영어 발음과 다르고 영어권 사람들에게 어려우니 쉬운 단어를 이름으로 만드는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첫 영어 이름을 지을 때 기존의 영어 이름을 골라 쓰는 대신 고집스럽게 당시 나의 이메일이나 영어 아이디로 쓰던 ‘레드 실버’를 이름으로 썼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차피 진짜 이름이 아닌데 굳이 규격에 맞는 이름이 필요할까. 그냥 내가 불리고 싶은 단어로 불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스페인어 이름 짓기 미션 때도 마찬가지였다. 많이 쓰는 간단한 스페인어 이름들 중 맘에 드는 것이 없어 고민 끝에 ‘레드 실버’를 스페인어로 하자니 너무 길어서 ‘빨간’이라는 형용사‘roja로하’를 이름으로 쓰겠다고 했다. 선생님이 처음엔 조금 난감해하셨지만 결국 그 단어는 줄곧 나의 스페인어 이름이 되었고, 한국에서 한 5년 그 이름으로 익숙하게 쓰다 보니 스페인에서도 쓰게 되어 스페인 친구들은 나를 ‘로하’라고 불러주었다. 학원에서만 쓰던 이름이 결국 일상에서 불리는 제2의 이름이 된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일까. 한국에서 스페인어 수업을 하며 이름 짓기를 할 때 학생들에게 굳이 존재하는 이름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스페인어로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문장을 만들 때 의문사 ‘Qué 무엇’ 대신 ‘Cuál 어느’을 쓴다. 그 말은 이름이 이미 존재하는 이름 들 중 선택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한국 이름은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기에 굳이 그런 정해진 이름 중 고르기보다는 한국 단어 중에 불리고 싶은 단어를 찾거나, 이를 살짝 변형하거나 해서 이름을 짓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생들은 굳이 새로운 이름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지만 한 둘 정도는 하늘이나 구름, 혹은 각종 본인이 원하는 형용사들을 이름으로 지어오곤 한다. 얼마 전 SNS에서 본 짧은 영상에서 누군가 ‘스페인어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뭐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대답으로 ‘감바스(새우) 어떠냐’고 가볍게 답해주는 걸 보고, ‘그래 바로 그런 거지’라고 맞장구를 친 마음은 이런 마음이었다. 우리는 무엇으로든 불릴 수 있으니까. 스스로 이름을 지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그렇게 활용해 보는 거다.
길게 외국어 이름 짓기 이야기를 한 것은 수업시간에 한국어 자기소개를 하는 기본 문장을 배우고 각자 자신의 이름, 국적 등을 이야기하는데 문득 한국어 수업에서는 한국어 이름을 굳이 따로 짓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어나 스페인어 이름을 짓는 것이 발음의 편리성을 위한 것이라면 반대로 굳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발음의 한국어로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어서 일 것이다. 그래도 편리성을 떠나 내가 배우는 언어의 발음으로 만들어진 나의 이름을 가지는 경험으로 ‘한국어 이름 짓기’를 한번쯤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즉흥적으로 학생들에게 한국 이름을 한 번 지어보라는 과제를 주었는데 역시나 어려워했다. 한국어 이름의 형태나 의미 등을 모르고 발음까지 어려우니 이제 겨우 알파벳을 더듬더듬 발음하는 학생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숙제였던 것이다. 겨우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을 골라오거나 ‘요정’ ‘천사’ 같은 단어를 찾아서 짓기도 했지만 온전히 ‘내 이름으로 이것을 하고 싶어요’라고 할 만한 이름들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한국어 이름 짓기’는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의 미션으로 미루어 두었다.
비록 ‘다음에’가 되었지만 한국어 수업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학생들이 읽고 쓰는 일에 조금 더 익숙해지게 되면 다시 한번 한국어 이름 짓기 수업을 따로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이름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들과 의미들을 공유하고 그 안에서 자신과 어울리는 혹은 자신이 불리고 싶은 한국어로 만들어진 단어 하나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 또한 언어 공부의 새로운 경험이 될 테니까.
그리고 혹시 알까. 그렇게 지어진 이름이 일상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주는 이름이 될지도. 나의 제2의 이름 ‘로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