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건 장편소설 <급류>
혼란하고 탁한 표지가 제목과 썩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단단한 재질의 커버도 마음에 들었다.
올해 몇 번 드나든 서점에서 꽤 오래 베스트셀러를 진열하는 선반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었던 책인지라 호기심이 들어 집어 들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가벼워 놀랐다.
그리고 읽는 내내 들고 있는 책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한번 더 놀랐다.
등장인물들의 우울에 책이 점점 젖어가고 있어 무게가 불어나는 걸까.
읽는 내내 불안하고, 서걱였던
정대건의 장편소설, <급류>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시작은 엠티와 휴양을 주업으로 하는 작은 마을 진평의 강 하류에 떠밀려온 소방관 최창석 씨와 미용사 전미영 씨의 뒤엉켜 부패한 끔찍한 시실이 발견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각자 가정이 있고 자식이 있는 남자와 여자가 왜 부둥켜안은 시신으로 강에서 발견되었는지 모를 일이라고 쑥덕이면서.
소설은 다시 1년 전 과거로 돌아가 여자주인공 도담이 서울에서 내려온 낯선 소년, 남자주인공 해솔을 강에서 구해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풋풋한 첫사랑의 감정이 피어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이미 소설의 시작에서 그 첫사랑이 곧 애달프고 끔찍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을 알고 있기에 그 수줍은 설렘이 못내 불안하다.
첫 장에서 진평강에 끔찍한 모습으로 함께 떠내려온
최창석은 도담의 자랑스러운 아빠, 전미영은 해솔의 애틋한 엄마였기 때문이다.
도담과 해솔은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죄책감과 자기혐오를 얻었다. 잃은 것은 외도한 아빠와 그저 안쓰러운 엄마뿐이 아니었다.
같은 상처를 가졌다는 이유로 서로를 불행의 상징처럼 여긴 어린 연인,
거기에 얹어 자기 자신도 잃은 듯하다.
요즘 유행처럼 분류하는 MBTI에 비유하자면, F형 그 자체였던 섬세하고 감성적인 소년 해솔은 감정이 마치 죄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외면하고 배제한 채 T형 인간으로 스스로 구속하듯 그 시간에 멈춰 버텨냈다.
반대로, 이성적이고 자신의 생각에 확고했던 소녀 도담은 요즘 말대로 마치 도파민에 절여진 사람처럼 새로운 것에 중독되어 이성을 마비시키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자신이 뭐 좋아하고 아닌 지 모르는 냥 스스로를 냅다 풀어놓고 시간에 맡긴 채 흘러갔다.
소설은 이 두 사람이 겪은 상실로 얻은 상처를 대하는 방식과 치유하는 과정을
물이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은유적으로 풀어낸다.
강물에서 만나 구해진 인연,
그리고 잘못된 만남을 가진 연인을 단죄하듯 삼켜 그 인연을 원망하게 한 것 역시 같은 강이었다.
해솔이 포기하고 싶었던 삶을 내던지려고 했던 강,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다른 삶을 구함으로써 함께 해솔의 삶을 건져 올린 것 역시 강이었다.
아픈 아내와 자신을 의지했던 어린 딸을 배신한 벌을 받듯
죽어서도 미움과 오명은 함께 태워지지 못한 남자가 뿌려진 바다,
그리고 바로 그 바다에서 다른 생을 구하면서 미움과 상처까지 씻고 올라온 듯한 딸까지.
물은 계속 흐르면서 새로운 시간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안에서 상실과 상처, 방황과 치유, 그리고 회복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마치 인생처럼.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상실을 치유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의 기억을 상실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솔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시점은 혼자서 내내 품고 살았던 비밀을 도담에게 털어놓는 시점이다. 안에서 꺼내놓고 허공에 흩뿌리고서야 마음이 놓이는 것.
도담 역시 마찬가지다.
아빠에 대한 미움을 놓아버리는 것, 그래야 비로소 다른 감정들이 그 자리를 채우기 마련이니까.
비워야 채워지고 채워져야 나아갈 수 있다.
결국 상처를 치유하는 건 잊고, 잃고, 놓는 것이 아닐까.
여담으로,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내가 가장 안쓰러워 견딜 수 없는 것은 두 주인공이 아니라
도담의 엄마 정미와 친구 희진이다.
배신의 이유도, 언제부터 시작된 외도인지도 모른 채
그저 평생을 응원하고 사랑했던 남편을 잃었는데
죄 없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부지런한 상상력으로 스스로 괴로워야 하는 정미.
심지어 원망할 대상은 죽고 없는 와중에 곁에 남은 딸은 남편의 내연녀의 아들과 지긋지긋하게 인연을 맺고 겉돈다. 위로받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사람.
도담이 이 나쁜 계집애. 해솔이 생각하듯 엄마 마음도 좀 생각해 봐라.
희진이는 또 어떠한가.
지나가는 말로 그냥 '-하던데?' 했던 말 때문에,
의도도 없고 목적도 없는 말 한마디 때문에 도담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해솔의 가정이 무너졌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살았으면서
그래도 자기는 눈에 띄는 피해는 입은 게 없으니 티도 못 내고 평생을 검열하며 산다.
도담과 해솔은 자기들의 행동, 선택 때문에 벌어진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혀를 찰 불행의 주인공이라서 대놓고 아파할 수나 있지,
정미와 희진은 본인들이 직접 뭐 한 건 없음에도
트라우마가 그들보다 극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같은 상실의 사건에 대한 상처를 드러내놓고 위로받고 치유받을 수도 없는 것 같아서 안쓰럽다.
항상 주인공보다 주인공 옆에 있는 조연들이 더 신경 쓰이고 궁금한,
다정도 병이다.
ⓒ오늘, 2025. 본 콘텐츠의 동의 없는 사용 및 재가공을 통한 창작은 불가합니다.
본 콘텐츠는 해당 브런치북의 작가 본인의 블로그에 게재한 글을 재구성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