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프다고 변할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쉽지 않다. 내 몸이, 내 마음이 과거의 나와 내 생활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요양 2년 차, 강제성을 띈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했다. 단, 즐거울 것! 남들이 운동하러 헬스장을 가듯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학원을 가는 동안 걷기 운동도 겸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이틀에 한 번, 연습실로 출근했다. 돈을 버는 출근이 아닌 돈을 내는 출근은 스트레스 받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신났지. 게다가 29년 만에 다시 피아노를 쳤는데 손가락이 건반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견해, 대견해! 체력도 점점 좋아졌다. 하여, 매일 피아노 학원에 출석했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다. 좀 살만해진다 싶으니 연습 시간을 늘리고 싶어졌는데, 슬금슬금 늘리는 게 안 되더라는 것. 옆방 연습생보다 더 연습하고 집에 가겠다는 마음이 슬며시 피어오르는 중에 레슨 선생님 왈, "OO씨가 우리 학원에서 가장 연습을 오래하는 학생이잖아요. 소개팅 끝나고도 피아노 연습을 하러 왔더라니까요."
옳거니! 이거지! 마음속으로 "나도나도, 그럴래"를 외쳤다. 더 많이 연습해서 하루 빨리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여기에 더해, 아마추어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러다 탈이 났다. 재미있어서 시작했는데 어느 날부터 레슨 시간이 두려워졌고, 연습 시간은 고통이었다. 피아노 연습을 일처럼 하는 나를 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왜 쉬질 못하니? 즐기질 못하냐고!
워커홀릭의 관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성과주의의 폐해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뫼비우스의 띠에 갇히듯 영원히 일만 가득한 세상에 남게 된다. 희귀병 환자가 되어서도 말이다.
쉬는 법을 잊은 k-직장인도 마찬가지. 쉬라고 하면 죄책감부터 든다. 일을 하지 않는 상태가 낯설다. 뭐라도 하고 있어야 안심이 된다. 문턱까지 번아웃이 찾아왔지만 상사와 동료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외면해버린다.
생활력 휴식법은 취미도 일처럼 해버리는, 아픈데도 제대로 쉴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화들짝 놀라며 탄생했다. 일하듯 피아노 연습을 하고 이틀을 앓아눕는 건 아무래도 문제가 있지 않은가.
생활력 휴식법은 ‘내 생활을 돌볼 수 있는 에너지 관리법’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력은 나를 돌볼 수 있는 힘 즉, ‘씻고, 먹이고, 입히고, 일하고, 재우는 일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힘’을 일컫는다.
생활력 휴식법은 <생활력 트래커>를 기록하면서 이루어진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을 적고, 그 일에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체크하면 된다. 참고로 복숭아색으로 칠해진 부분은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일, 연두색으로 칠해진 부분은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일이다.
k-직장인은 하루 중 대부분의 일에 전력질주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매일 해야 할 일 중 에너지를 크게 쏟아야 하는 일은 많지 않다. <생활력 트래커>를 쓰다보면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파악된다. 그 일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나 같은 경우 저녁 10시 전에 잠들어 오전 5-6시쯤 일어나는 생활 패턴이 에너지의 충전도가 가장 높다는 걸 알게 됐다. 또 기상 후부터 오전 10시까지의 집중력이 최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때문에 하루 중 가장 많은 에너지를 요하는 일은 반드시 이 아침 4시간을 활용한다. 이를테면 ‘꼭 해야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시간동안 끝내려고 노력한다.
이후에는 적절히 에너지 충전이 되는 일을 하면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을 부담 없이 해치운다.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쓸 것인지를 미리 정해두었기 때문에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큰 노력이 들지 않는다.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 과거의 나는 거절을 잘 하지 못했다. 오지랖은 어찌나 넓은지 누가 도와달라고 하면 잽싸게 날아가 일을 거들었다. 일을 잘하는 나에 취했었다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술에 취하는 편이 더 남는 장사였지 싶다. 그건 흥도 나고 신이라도 나니까.
<생활력 트래커>를 사용하면 나의 에너지 총량에 민감해진다. 에너지를 소진하고 다시 충전시키는 일에 얼마만큼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지를 알기에 되도록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든 확고한 나만의 기준이 세워지는 것이다. 뭐든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일인가, 소진시키는 일인가를 두고 결정을 내린다.
이젠 열정페이에 흔들리지 않고 “그건 안합니다.”를 외칠 수 있다. 재미있어 보인다는 이유로 아무 일이나 덥썩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부 전화를 빙자해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며 하소연만 늘어놓는 전화도 미안해하지 않고 끊는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차단하기만 했는데, 어느 새 나는 프로 거절러가 되어 있었다. 근데 좋아, 편해. 그리고 삶이 단순해졌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일만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쉬는 법을 잊게 된다.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빈둥대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만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나 왜 이렇게 한심하지?'
한데,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면서 시간을 때운다. 쉬었지만 쉰 것 같지 않은 찝찝함이 남는다.
생활력 트래커를 활용하면서 깨달았다. 휴식은 ‘에너지가 충전되는 일을 해주는 일’이란 걸. 좋아하는 작가가 쓴 새 글을 읽을 때, 좋아하는 작곡가의 음악을 들을 때, 최애를 덕질 할 때, 과거의 시간이 얽힌 골목길을 산책할 때, 사라지는 것들의 새로운 쓸모를 궁리할 때 나는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솟구친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면서, 절로 에너지가 샘솟는 일. 이것이 바로 나를 위한 휴식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죄책감도 들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즐거운 무언가를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근면성실하고 부지런한 한국인에게 안성맞춤 휴식법일 수밖에. 후에 알았는데 실제로 조선시대 선비들은 공부를 하고 남은 휴식 시간에 다시 시(詩)를 공부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아, 역시 그런 거였어.
끌리는가, k-휴식법. 함께 할텐가?
휴가를 부추기던 여행작가였다. 번아웃을 방치하다 희귀병 환자가 되었다. 3년 동안 요양하며 깨달았다. 우리 삶엔 가끔의 휴가보다 매일의 휴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나답게 일하고, 나답게 잘 쉬고, 나답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조화로운삶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 날마다 일상의 작은 기쁨을 충전하면서 ‘잘 쉬는 기술’을 궁리하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