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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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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Dec 21. 2020

프리랜서 엄마의 하루

- 아침 -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으로 시계를 확인한다. 오전 10시 20분. 오빠는 출근했을 시간이고, 내 자리를 차지하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아이를 보니 귀엽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새벽 내내 못 자게 괴롭히더니 이렇게 잘 잔다고? 어기적거리면서 거실로 나온다. 거실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사과 접시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토마토 꼭지 모양의 덮개를 열면 한눈에 봐도 공들여 깎은 사과 네 조각 사이에 작은 티 포크가 놓여 있다. 쪼그려 누워 밤새 뒤척이다 악몽을 꾸며 깬 오늘 같은 날도 피식 웃음 짓게 하는 디테일. 오빠는 아무리 피곤해도 간단한 아침을 챙겨놓고 출근한다. 어떤 날은 호박즙에 인삼 반 뿌리를, 어떤 날은 군고구마를, 어떤 날은 생수에 담가둔 사과를, 어떤 날은 시리얼을. 덕분에 어떤 밤을 보냈든 씩 웃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면 아침부터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따 오빠가 퇴근하고 오면 잠들기 전까지 재밌게 해 줘야지.


8시 반쯤 졸면서 젖을 물렸으니 아이가 일어나기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노트북을 켤까 하다가 읽다만 책을 펼친다. 유일하고 온전한 내 시간. 거의 필사적으로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거나 이런 글을 끼적이거나 스트레칭을 한다.  


아기가 깨면 밥을 먹이고 모빌 아래 눕힌 뒤 열심히 웃겨준다. 말도 걸고 눈도 맞추고 손가락 발가락도 꼼지락 거리고 얼굴을 부비부비 하다 보면 입술과 발가락을 모으고 인상을 쓴다. 똥 누는 시간이니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준다. 그때 나도 씻고 오빠한테 전화해서 생존 신고도 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볼일이 끝나면 옹알옹알 나를 부른다. 엉덩이를 씻기고 다시 로션을 바르고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히면 졸려서 칭얼칭얼. 안아서 다시 재운다. 20분 간의 눈물 바람 끝에 드디어 잠들었다. 이제 40분의 쉬는 시간이 생겼다. (운이 좋으면 1시간 반도 잔다)



- 점심 -

점심은 최대한 간단하게 때운다. 낮잠 시간은 대체로 짧고, 밥을 차리는 동안 아기가 깨서 다음 낮잠 시간에나 먹기 일쑤니 빵이나 시리얼로 대신하고 그 시간에 할 일을 한다. 이때의 할 일은 필요한 아기 용품을 검색하고 비교하고 구매하는 일이다. 아기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그때마다 필요한 용품이 다 다르다. 막 백일은 넘긴 여름이는 젖병을 1단계에서 2단계로 바꿔줘야 하고, 기저귀도 2단계에서 3단계로 바꿔줘야 하다. 유모차에 태워야 하는데 겨울이라 날씨가 추우니 유모차 방한 커버와 유모차 라이너를 사야 하고, 밖에 데리고 나갈 때를 대비해 외출용 겨울 모자도 사야 한다. 양말이 작아져 다리에 자국이 남으니 양말도 한 사이즈 큰 것으로 사야 하고, 누워서 즐겨 보던 모빌을 지겨워하니 발달에 맞춰서 새로운 장난감도 사줘야 한다. 이 모든 걸 검색하고 또 검색하고 주변에 물어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오늘은 유모차 방한 커버를 샀다. 어제 처음으로 유모차에 태워 혼자 외출을 했는데 방한 커버도 없이 여름이를 데리고 나갔다가 애기를 꽁꽁 얼릴 뻔했다.


첫 번째 낮잠에 '엄마의 일'을 마치고 다시 먹이고 놀아주고 재우기를 반복하면 아기의 두 번째 낮잠부터 내 일이 시작된다. (드디어!) 혼자 원고를 살펴보고 수정하는 게 주된 업무지만 필요할 때는 이 시간에 스피커폰 혹은 페이스타임으로 회의를 하고, 검토해야 할 책이나 기획안을 살펴본다. 역시나 아기의 낮잠이 짧기 때문에 진득하게 원고를 보는 건 어렵고 전날 새벽에 수정한 내용을 확인하는 정도다.

다시 울음소리와 함께 여름이 등장. 밥을 먹이고 소화를 시킨 후 터미 타임이나 쭉쭉이 같은 몸으로 하는 놀이를 해준다. 손가락 발가락을 움직여 주거나 새로운 동요를 틀어주고도 심심해하면 동화책을 읽어준다. 얼마 안가 졸려하는 애기를 안고 이번엔 나도 같이 잔다. (자야 한다!)


- 저녁 -

꿀잠을 자고 애기보다 조금 먼저 깨서 나와 밥을 한다. 퇴근하고 집으로 다시 출근하는 오빠를 위해서 하는 거의 유일한 일이니 즐겁게 한다. 이때는 아기가 깨서 울면 살짝 달래서 모빌 아래 뉘어  놓고 저녁밥에 집중한다. 주로 김치찌개, 제육볶음, 수육, 아욱 된장찌개 같은 오빠가 좋아하는 메뉴를 만들고 목요일 즈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금요일에는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다. 덕분에 요일 개념 없는 프리랜서지만, 금요일을 기다리는 맛이 쏠쏠하다.


오빠가 오면 번갈아 가며 애기를 보며 저녁을 먹고 목욕을 시킨다. 내가 애기 몸에 로션을 발라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동안 오빠는 목욕 용품을 정리하고 분유를 탄다. 내가 분유를 먹이는 동안 오빠는 설거지를 한다. 트림을 시키고 조금 놀아주는 동안에 오빠는 과일을 깎아서 내놓고, 거의 처음으로 셋이 나란히 앉아 과일을 먹는다.


이때부터 오빠는 애기를 돌보고, 나는 노트북을 켜고 앉는다. 목욕하고 배가 부른 여름이는 금방 잠이 들지만 30분 내외로 다시 깨서 보챈다. 애기가 울든 놀든 상관 않고 교정에 집중하는 시간. 나는 최대한 집중해서 원고를 본다. 마지막으로 재우는 건 내 몫이라 애기가 밤잠을 자겠다는 신호를 보내면 애기를 받아 들고 다시 재운다. 가까스로 잠든 아기를 눕히고 나오면 1시 반. 보던 원고를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끄면 2시 반. 3시간마다 뒤척이는 애기에게 비몽사몽 젖을 물리며 하루가 마무리 동시에 다시 시작된다.


  

전에 같이 일하던 실장님이 왜 업무 답장을 새벽 3-4시에 하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애기 재우다가 깜빡 같이 잠이 들었고 2-3시 되어서야 업무를 확인했겠지..! 아침마다 까치집을 하고 빠른 걸음으로 출근하고 더 빠른 걸음으로 퇴근하던 실장님을 더 배려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게 안쓰럽다거나 힘들어 보이는 게 아니라 되게 멋지다고 생각한다.

왠지 혼합수유 같은 프리랜서 엄마의 하루. 출퇴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결 여유로운 ‘워킹’을 하고 애기도 마음껏 보고, 나의 일도 엄마의 일도 놓치지 않고 싶은 욕심에 조금 바지런을 떨어보는 하루. 내일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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