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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Feb 02. 2021

사랑하는 일요일 풍경

느지막이 일어나 보니 남편이 따끈한 식빵과 앙버터를 사 왔다. 어제 퇴근길에 빵집에 들러 식빵 나오는 시간을 물어봤다고 (우쭐거리며) 말했다. 막 잠에서 깬 애기 기저귀를 가는 동안 남편은 사부작사부작 계란을 굽고 유리컵에 우유를 담고 나무 도마에 빵을 올린다. 나름 고심해서 그릇을 고르는 투박한 손이 귀엽다. 막 나온 식빵은 따로 굽지 않고 그냥 먹어도 맛있다. 버터와 함께 엄마가 만들어준 오렌지잼이나 산딸기잼을 발라 먹는 것이 내 취향이지만, 아침밥 대신이니 빵을 반으로 접어 계란 후라이를 끼우고 케첩을 잔뜩 뿌려 흰 우유와 함께 먹는다.


그렇게 아침 겸 점심을 때우고 유리컵에 얼음을 잔뜩 넣어 커피 두 잔을 내린다. 커피 머신을 한 번 헹궈달라는 둥, 새 물로 커피를 내려달라는 둥, 미지근한 물 말고 찬물을 넣어 달라는 둥 디테일한 요구가 쏟아지지만 아랑곳 않고 내 방식대로(=대충) 커피를 내린다.  오랜만에 거실 깊숙이 햇살이 들어온다. 게다가 모처럼 따뜻하다. 일주일에 한 번뿐인 소중한 일요일 오후를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커피를 호로록 마시고 쌀에 잡곡을 섞어 밥을 안치고 분리수거를 하고 아기와 신나게 놀아주고 겨우 낮잠을 자러 들어간 남편을 조용히 깨운다.

"날씨 좋은데 산책하러 갈래?"

작은 방 구석에 처박혀 있던 유모차를 꺼내 밖으로 나갔다. 산책이라 봤자 아파트 단지를 서너 바퀴 도는 것이 전부지만, 아이는 유모차 커버 너머의 세상이 신기하고 나는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난다. 피곤한 오빠만 자꾸 피곤한 이상한 일요일 XD

 

다섯 시, 집에 돌아와 이른 저녁을 먹고 남편과 아이가 잠들었다. 낮에 사 온 햄버거 봉지와 콜라 컵, 커피가 반쯤 남은 스타벅스 컵, 먹다 남은 던킨 도넛, 떡볶이 그릇, 귤껍질, 탄산수 병 같은 것들이 검정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다. 혼자 어제 보다 만 <아메리칸 셰프>를 보다가, 자다 깬 애기를 데리고 나와 내 옆에 다시 재우고 노트북을 켠다.


지금 나는 거실 가운데 벽에 등을 대고 앉아 있다. 아기는 53분째 잠을 자고, 나는 미룰 수 있는 건 최대한 미룬 채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집은 엉망인데, 그게 너무 일요일 같아서 좋다. 옆에서 고롱고롱 코 골다가 한 번씩 큰 숨을 쉬거나 뭐라뭐라 잠꼬대를 하는 애기 소리와 타닥타닥 자판 소리가 전부인 일요일 저녁. 곧 두 남자가 일어나고 영화가 끝나면 다시 시끄러운 예능으로 채널이 돌아가겠지만, 요 잠깐이 너무 좋아서 남겨본다. 잠든 애기 얼굴은 예쁘고, 남편의 베스트 5 영화 중 하나라는 영화가 너무 따뜻해서 행복하다. 으으 관리사무소 아저씨 방송하지 마세요. 아기 깬다고요! 깼다...... 일요일 안녕. 다음 주에 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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