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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Apr 26. 2021

다정한 남자와 사는 것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다. 한번 말한 걸 두고두고 기억해주는 사람. 기억하는 것을 당연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 내 꿈을 나보다 더 응원하는 사람. 한결같고 또 성실한 사람. 매 순간 뜨겁게 열기가 솟아나는 사람은 아니지만, 따순 온기를 언제까지고 잃지 않는 사람이다.      


뜨겁고 차갑고를 반복하는 내게 남편의 존재는 커다란 위안이자 평온이다. 조금 전에도 여름이가 낮잠을 안 잔다, 이 놈의 띄어쓰기는 편집할 때마다 헷갈린다, 오늘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 왔다, 와도 문제다, 여름이가 안 자서, 간식 먹고 싶은데 PT 선생님한테 혼날 것 같다....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쏟아내고서야 진정하고 노트북을 켰다.


남편은 늘 그렇듯 다정하고 평온한 목소리로 하나하나 대꾸해 주었다. 점심에 어머니가 싸주신 게장을 먹으려다가 게딱지를 열 줄 몰라서 허둥거렸다고 하니, 그걸 글로 쓰라고 했다. 그게 뭐냐고 웃어넘겼지만, 지금껏 남편이 대신해주어 내가 할 줄 모르게 된 것들에 대해, 그러니까 남편의 다정함에 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운동을 시작한 뒤, 남편은 여름이의 수유와 함께 내 아침 식사를 담당하고 있다. 양상추와 계란으로 시작한 조촐한 아침 식탁은 아보카도 과카몰리, 연어 덮밥, 야채 커리, 렌틸콩 샐러드 같은 메뉴로 매일 업그레이드 중이다. 야채는 당일 배송으로 신선하게, 단호박은 지하 마트가 맛있으니까 귀찮아도 직접, 고기는 회사 근처 정육점에서 그때그때 용도에 맞게 썰어서. 나름의 규칙이 있고, 그걸 참 잘 지킨다.      


뭐든 두 개씩 고르는 나와 달리, 남편은 신중을 기해 하나씩만 산다. 자기 것은 싸고 양 많은 것을 기준으로 삼고(그나마도 잘 사지 않는다) 내 것은 비싸도 예쁘고 질 좋은 것이 기준이 된다.      


아침 9시 반, 예쁜 1인용 테이블보 위에 (고심해 골라 딱 하나만 산) 나무 그릇에 정성껏 차려 준 아침을 먹으면서 이게 무슨 호사인가 싶다. 우리 엄마도 아침은 안 차려 줬는데. 출근 준비는 대충 하고 가쓰오부시로 직접 쯔유 소스를 만들거나 온 힘을 다해 아보카도를 으깨고 있는 남편을 보면, 남편이 아니라 아빠 같은 느낌이다.      



결혼 생활을 잘하는 비결 중 하나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라고 들은 적 있다. 정말 그렇다. 여름이를 낳아보니 ‘자식을 대하는 마음’의 팔 할은 인내다. 남편은 배고픔과 숙취를 잘 참고, 나의 변덕과 시도 때도 없는 서운함을 잘 참고, 웃는 얼굴 한 번을 보기 위해 많은 것을 참는다. 그리고 그 웃음 한 번에 지난 수고를 기꺼이 잊는다.           


매달 넷째 주에는 시부모님의 시골집에서 주말을 보낸다. 화덕 피자를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더니, 며칠 동안 유튜브를 뒤지고 사부작사부작 돌을 주문해 미니 화덕을 만들어 주었다. 종류별로 치즈를 주문하고 자잘한 재료를 챙기는 것이 모두 그의 몫이었지만,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나는 남편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올리는 수고도 하지 않고 맛있게 먹기만 하지만(심지어 남편이 여러 번 보내준 ‘피자 만드는 법’ 유튜브 링크를 열어보지도 않았다. 남편이 서운해하는 건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인데, 그건 좀 서운해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너무 했다. 반성한다), 남편은 잘 먹어주는 걸 고마워하는 사람이다. 부모의 마음이 아니고서야, 이럴 수 없다고 종종 생각한다. 나는 정말 운이 좋다.      



문제는, 원래 뭐든 혼자서 잘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주 사소한 것도 묻고 또 묻는다. 약간 바보가 된 기분.

- 오빠 나 글 먼저 써, 일 먼저 해?

- 오빠 고등어에 원래 가시가 이렇게 많았나?

- 오빠 게딱지 어떻게 여는 거였지?

- 오빠 나 오늘 점심 뭐 먹어?

...

더 멍청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겠다.           



이런 글을 이렇게 길게 쓰는 이유는, 우선 이 글을 남편이 볼 예정이기 때문이고(>_<), 내가 누리는 이 커다란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다. 7년을 하루같이 쏟아준 그의 사랑 덕분에 나는 여름이도 사랑하고 친구들도 사랑하고 이름 모를 사람들의 안녕을 넉넉하게 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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