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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Aug 09. 2021

수확의 계절

여름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계절. 시부모님의 텃밭에 일 년치 땀과 정성이 결실을 맺는 계절.

여름의 강원도는 시원하고 알록달록하다. 앞마당과 뒷마당에 작은 텃밭을 꾸렸을 뿐인데, 수박과 옥수수, 감자, 포도, 참외, 복숭아, 자두, 블루베리, 가지, 고추, 당근, 오이, 완두콩 같은 아름다운 것들이 주렁주렁 달리다니! 과일가게가 아니라 집 앞에서 좋아하는 열매를 따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놀랍고 신기하다. 물론 사람이든 열매든 저절로 자라나는 건 없다. 덥고 고된 건 당신들 차지고, 달고 예쁘고 재미있는 것만 하게 해주려는 어른들의 다정한 마음 덕분에 우리는 수확의 기쁨만을 골라 누리며 여름이 오기를 일 년 내내 기다린다.


강원도의 텃밭은 우리가 결혼하던 해부터 가꾸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애들이 놀거리가 있어야 자주 온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평일엔 서울에서 생활하고 주말마다 강원도를 오가던 시부모님은 강원도에 갈 때마다 동네 어르신들과 술친구를 하며 농사를 배웠다. 이웃들의 조언에 따라 이 동네에서 많이 심는 작물을 심어도 보고, 손이 덜 가는 작물을 골라 심어도 보고, 앞마당, 옆 마당, 뒷마당 여기저기로 자리를 옮겨 심어도 보며 지금의 텃밭이 완성되었다(포도나무는 네 번쯤, 수박은 여섯 번쯤, 블루베리는 세 번쯤 자리를 옮겼다). 어떤 해에는 수확 시기를 놓쳐 공들여 키운 고구마를 다 버리기도 했고, 기대도 안 했던 감자 풍년을 맞이하기도 했고, 사과가 하나도 열리지 않아 속이 상했던 해도 있었다.


몇 년 간의 시행착오 끝에 시부모님은 농사가 생업인 동네 사람들에 맞추다가는 텃밭만 가꾸다가 끝나겠다고 판단하고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작물만 심을 것, 상추와 쪽파, 부추처럼 빨리 자라는 작물은 아주 조금만 심을 것(그렇지 않으면 상추 폭탄을 맞는다), 깨나 콩처럼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은 사 먹을 것.




흙을 일구어본 사람은 알고 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가드닝이란 여전히 원초적인 노동의 영역이라는 것을. 잡풀을 뽑는 데 호미보다 좋은 도구는 발명되지 않았고 성능 좋은 스프링클러도 세심히 토양을 살피며 물 주는 사람의 손길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정원가는 육체노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태양의 운행에 신체리듬을 맞춘 채 땀 흘리는 존재들이다.
- <정원 만들기> 전시 중에서

 

시골의 아침은 일찍 시작된다. 해가 지면 할 일이 없어 일찍 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특히 여름에는 뜨거운 한낮을 피해 아침저녁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집에서 제일 게으른 사람이자, 제일 늦게 일어나 시어머니가 차려준 아침밥을 눈도 못 뜨고 겨우겨우 먹는 내게 ‘시골의 아침’은 먼먼 이야기였다.


요즘은 아침 운동에 재미를 붙여 '강원도에 가면 일찍 일어나서 선선한 바람 맞으며 산책을 해야지'하고 생각하다가 새벽 여섯 시, 눈뜨자마자 집을 나서 보았다. 강원도에 놀러 와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건 5년 만에 처음이다. 선선하다 못해 쌀쌀한 공기가 모처럼 쾌적하다. 고요할 줄 알았는데 새도 울고 닭도 울어 요란한 새벽. 아랫집 옥수수가 많이 자랐네, 오 이 집은 고추를 따야겠구나, 저건 당근인가, 참견을 하느라 혼자 걷는 길도 심심하지 않았다.


새벽 산책을 다녀오는 길, 일곱 시 반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 마을 곳곳에 풀을 뽑고 밭을 일구는 사람이 여럿이다. 참 신기한 풍경이다, 하며 집으로 돌아왔더니 우리 집 밭에도 일찌감치 시부모님이 밭일을 하고 계셨다. 매번 늦게 일어나서 몰랐는데, 아침마다 이런 풍경이었겠구나.


얼른 샤워하고 토마토 먹으라는 시아버지의 말을 뒤로하고 땀난 김에 어머니와 감자를 수확하기로 했다. 감자 줄기를 힘껏 뽑으면 주먹만 한 감자들이 데굴데굴 달려 나왔다. 어쩜, 이렇지? 우리가 캐고 싶을까 봐 지난주에 다 캐려다가 조금 남겨놨다는 말을 들으며 신나게 감자를 주워 바구니에 담았다. 조금 사부작거렸을 뿐인데 한 바구니가 금방 찬다. 그 기분에 취해 어머니 옆에서 호미를 들고 깔짝깔짝 풀을 뽑고, 가지와 오이, 고추를 따며 아침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땀 흘리는 기분이 좋고, 그걸 다 하고도 아직 아홉 시 반이라는 게 너무 좋았다.


내가 여기 정착하려 한 것은 자연 친화적인 삶을 꿈꿨기 때문도 도처에 도사린 불안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그냥 아파트가 너무 편해서, 온종일 몸 놀릴 일이 너무 없는 게 사육당하는 것처럼 답답해서 나에게 맞는 불편을 선택하고자 했을 뿐이다. 내가 거둬야 할 마당이 나에게 노동하는 불편을 제공해준다.
- 박완서 <호미>




오빠와 여름이는 아직도 꿈나라고, 시부모님과 셋이서 밭에서 요리조리 놀고 있으니 윗집 아주머니가 밭일을 마치고 호박을 들고 내려와 말을 건넨다.

"애호박 두 개 땄어, 아침에 먹어. 아이고, 토마토가 영 실하지가 않네. 엄마가 며느리 좋아한다고 토마토 잔뜩 심었는데. 우리 집에서 몇 개 따다 먹어."

우리는 거절하지 않고 윗집에서 토마토를 따 먹고 모닝커피까지 얻어먹었다.

오후에는 아랫집에서 아기 먹이라고 블루베리를 한 바구니나 따서 가져다주셨다.

"아기 먹을 거라 완전히 익은 걸로 땄어. 농약 안치고 키웠으니까 맛있을 때 먹어. 다 먹으면 와서 그냥 또 따 먹어? 알았지?"

시골 인심이란. 어쩐지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시골 인심이 좋은 건 땅이 넉넉하게 열매를 맺어주기 때문일까. 우리도 땀 흘려 수확한 감자와 가지, 옥수수를 펼쳐 놓고 나눠줄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나, 주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올해는 특히 수박이 아주 잘 익었다. 다섯 개 중 가장 커다란 수박을 따다가 여름이의 돌상에 올려주기로 했다. 온 가족이 함께 키운 수박을, 온 가족이 함께 키운 여름이의 첫 번째 생일에 나눠 먹을 수 있어 기쁘다. 다음 달에는 감자를 캔 자리에 배추를 심을 예정이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배추를 뽑아 내년에 먹을 김치를 만들어야지.


수확의 계절이 배부르고 부지런하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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