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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Aug 28. 2021

일상이 여행이 되는 순간

낯선 여행지에 혼자 떨어졌을 때,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하는 두 가지가 있다. 빵집 구경하기와 자전거 타기. 여행지에서 나의 루틴은 다음과 같다.


1. 숙소에 짐을 풀고 호스트 혹은 숙소 직원에게 어디에서 자전거를 빌릴 수 있는지 묻는다(의외로 검색보다 묻는 게 빠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용감하게 묻기'는 여행자의 특권이니까).

2. 자전거를 빌린다.

3. 자전거를 타고 동네 여기저기를 돌면서 주변 풍경과 분위기를 익힌다. 이때, 눈으로는 부지런히 빵집을 찾는다.

4. 자전거를 반납한 뒤 찜해놓은 빵집을 경유하는 코스로 산책한다.

5. 빵집에 들어가 빵 구경을 한다. 목적은 '구매'가 아니라 '구경'이다. 부스러기 하나까지 찬찬히 구경하고 진짜 먹고 싶은 빵을 한두 개만 사서 숙소로 돌아온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전거와 빵집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환경에도 낯을 가리는 성격상 동네를 눈에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한 바퀴를 휘휘 돌고 나면 깜깜했던 맵에 하나둘 불이 켜지는 것처럼 머릿속에 동네가 입력된다. 그리고는 가장 좋아하는 곳(빵집)에서 익숙한 냄새(빵 냄새)를 맡으며 안정을 찾는 것이다. 맛있는 빵은 덤이고.

다행히 어떤 나라든, 어떤 도시든 자전거 빌리기는 크게 어렵지 않고 구경할 빵집도 충분하다. 심지어 돈도 별로 안 든다.



여행지에서 꼭 자전거를 탔기 때문일까. 자전거를 타면 똑같은 아침도 여행지의 아침 같은 느낌이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는 기분까지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따릉이 마니아다. 서울에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는데, 따릉이를 탈 때가 그중 하나다. 신혼 때는 남편과 자주 자전거를 탔다. 퇴근하고 지하철을 타고 용산에서 저녁을 먹은 뒤 당산까지 한 시간 반을 자전거로 돌아오면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점점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녁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임신했을 땐 좋아하는 와인을 참는 것보다 따릉이를 참는 것이 더 힘들었다. 걷기엔 멀고 차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를 갈 때 자전거 만한 게 없는데, 갑자기 매일 타던 노선의 마을버스가 사라진 기분. 교통수단으로 따릉이를 이용하는 건 포기했지만, '내가 행복한 것이 태교 아니겠어?' 하며 몰래 공원 한 바퀴를 느릿느릿 돌기도 했었다.



요즘은 이른 아침에 타는 자전거의 맛을 알았다. 여름이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기라서, 아침 시간이 자유로운 편이다. 조금(많이) 피곤하긴 하지만 부지런을 떨면 두 남자가 자는 사이 혼자서 한 시간 정도 자전거를 타고 오는 것이 가능하다. 집 앞에서 따릉이를 빌려 여의도 쪽으로 한 바퀴, 선유도 쪽으로 한 바퀴를 돌면 한 시간이 딱 맞다. 다른 건 몰라도 몸을 움직이는 건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제맛이라고 믿는 나지만, 자전거만큼은 혼자여도 충분하다. 물론 둘이면 더 좋고. 셋이면 더더 좋겠지! (여름이와 셋이 자전거 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중)



친정에 가면 둘도 없는 자전거 메이트가 기다리고 있다. 아침 운동 마니아인 아빠는 33년째 엄마를 설득하지 못해 혼자 운동 중이다. 지난달에는 오랜만에 친정에 내려가니 집 앞에 새 자전거가 있었다. 엄마랑 같이 타고 싶어서 선물로 샀는데 몇 달째 땅을 밟지 못하고 묶여만 있다고 했다.


그날 새벽, 엄마 대신 새 자전거를 끌고 아빠와 함께 집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시골길을 천천히 달리며, 아빠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여긴 1+3코스야. 내일은 2코스로 가보자." 했다. "너네 엄만 아침잠이 많아서 큰일이야. 운동 좀 해야 되는데. 같이 나오면 얼마나 좋아?" 푸념도 빠지지 않았다.


이제 친정에 내려갈 때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빠 침대로 달려간다. 침대맡에 앉아서 "아빠 2코스으으..."하면 아빠는 귀신이라도 본 듯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엄마는 이불속으로 파고들며 슬며시 웃는다. “잘 다녀와들."



나는 자전거를 잘 모르고, 전용 자전거도 없고, 빠르게 탈 줄도 모르지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자전거를 탄 장면들이 꼭 포함되어 있다(얼마 전 아빠와 2코스를 달리던 순간도 '저장!'되었다:))).

적당한 속도로 지나치는 풍경, 스치는 바람, 언제든 멈춰서 사진을 찍거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까지, 자전거가 주는 기쁨은 꽤 다채롭다. 특히나 평소에 바람 때문에 행복하다고 느낄 일이 별로 없는데, 자전거를 탈 때는 존재감이 크다. 바람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자전거의 매력이란!

그러므로, 오래오래 자전거를 타고 싶다. 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으니, 일상이 여행이 되는 순간을 자주 느껴야지. 아빠와 오빠, 여름이도 내내 함께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자전거 타러 가려고 일찍 일어났는데 글을 쓰다 이 시간이 되었다. 아무튼, 오늘도 자전거 타러 간다! 다녀와서 여행지 조식 서타일로 아침 차려 먹어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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