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리 작가의 동화 <긴긴밤>
슬픔이었다가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이야기.
걷기,
그 어떤 긴긴밤이 오더라도.
루리 작가의 <긴긴밤>은 출간 후 독자들에게 꾸준히 사랑을 받고 있는 동화이다. 야생 코뿔소 노든에게 닥친 상실과 고통을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 가는 이야기이다. 삶에 대한 은유로 가득한 이 동화가 주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단 한 줄로 요약할 수 없는,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라서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코끼리 고아원'에서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왔던 코뿔소 노든은 바깥세상이 궁금했다. 자신의 내면이 코끼리라고 믿고 살아왔으면서도 노든은 바깥세상에 있다는 또 다른 코뿔소들을 만나고 싶었다. 노든은 야생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서 노든은 아내를 만났고 딸도 태어났다. 가족을 이룬 노든은 행복했으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총소리와 함께 나타난 뿔 사냥꾼들이 아내와 딸을 죽이고, 아내의 코뿔을 잘라간 것이다. 노든 역시 총에 맞아 크게 다치게 되었다. 다행히 피 흘리며 쓰러져 있던 노든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노든은 목숨을 건졌지만 파라다이스 동물원에 갇히게 된다. 노든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인간들을 향해 복수를 결심한다.
어느 날 동물원에 폭탄이 떨어지며 갑작스럽게 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은 뿔 사냥꾼 등으로 표현된 인간의 폭력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동물원은 아수라장이 되고 노든은 바깥세상으로 또다시 몰리게 된다. 노든은 절망 속에서 동물원을 빠져나가며 죽어가는 동물들을 바라본다.
그때 노든을 살린 또 하나의 존재를 만나게 된다. 바로 펭귄 치쿠였다. 치쿠도 동물원을 탈출하고 있었는데 검은 반점이 있는 알이 담긴 양동이를 물고 있었다. 치쿠가 품어 부화시키려고 하는 알이었다. 노든과 치쿠는 티격태격하면서도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로가 경험한 고통의 시간을 토해내면서 말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고통이자, 혼자만 살아남은 슬픔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긴긴밤을 함께 걸어간다.
메마른 사막을 걷느라 기운이 빠진 치쿠마저 죽자 노든은 다시 한번 절망한다. 그러나 이제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치쿠가 애지중지했던 알, 그 알을 이번에는 노든이 지켜야 했으니까. 동화 <긴긴밤>은 몇 번이나 혼자만 살아남은 외로운 노든의 이야기이자 생존자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든의 친구들은 고통에 휩싸인 채 분노하고, 복수를 결심하는 노든에게 말하기의 힘에 대해 들려주었다.
기분 좋은 얘기를 하다가 잠들면, 무서운 꿈을 꾸지 않아. 정말이야. 못 믿겠으면 시험 삼아 오늘 나한테 바깥세상 얘기나 들려줘 봐. 이봐, 나는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가 본 적이 없어. 같은 코뿔소끼리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하고 얘기 좀 들려줘.
루리 <긴긴밤>, 30쪽
고통스러운 경험을 말하기로 풀어내면 자기 치유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존재에게는 또 다른 존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노든이 몇 번이나 절망하면서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노든과 같은 길을 걸어가며 순간순간 마음을 나누었던 친구들 때문이었다. 노든은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잊히지 않는 지난 시간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그것은 치유의 시간이자 연대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긴밤>은 슬프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완성형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별이 빛나는 더러운 웅덩이(63쪽)'속에 있더라도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옆 사람은 희망이다. 내 온기를 나눠줄 수 있고,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