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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Mar 22. 2023

나도 너를 응원해

배명훈 소설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1. 초록

고모, 저 초록인데요. 사비로 이주해볼까 봐요. 친구가 기막힌 아이디어 하나를 공유(?)해줬거든요. 손글씨로 만든 필사책을 대여하고 파는 세책집 하나 제대로 내보려고요. 인공적인 건 넘치니까 수제품이 사치품으로 엄청난 인기잖아요. 


이건 친구가 자기 꿈이라고 말해준 건데요. 현대인이 꿈을 가질 수 있나요? 좀 말이 안 되는데, 난 왜 끌릴까요?


이초록은 꿈을 훔치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눈이 부시도록 좋아 보였고, 자기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주로 갈 수 있었으니까. <배명훈, 우주섬 사비의 기묘한 탄도학, 11쪽>




#2. 서운관

오호, 그래? 사비에 대해서는 좀 들어봤니? 커다란 휴지심 하나 떠올려볼래? 휴지심 안으로 촘촘하게 도시가 들어차 있는 이곳이, 우주섬 사비란다. 옥상에서 위를 쳐다보면 하늘이 아니라 또 다른 도시가 보이지. 


2분에 한 바퀴씩 돌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우리를 우주 미아로 만들지 않고 사비에 딱 붙어있게 만들어 주지. 지구의 자전 속도가 24시간에 한 바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를지 알 수 있겠지? 


지구인에게는 딱 멀미나기 좋을 환경이기만 금방 적응할 거다. 금수저라고 지구에서 허송세월 보내고 있다고 들었는데 사비에 와서 뭐라고 하면 좋지. 


너 할 일은 벌써 관직 하나 사놨어. 주소국장이라고, 어슬렁거리면서 놀다가 듣고 본 걸 나한테 알려주면 돼. 쉽지?



#3. 몇 달 후, 서운관

초록이 너 탐관오리 노릇이나 할 줄 알았더니 제법 알아보는 게 많구나.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동심원을 찾아냈다고? 동심원 주변에 작게 패인 자국까지 있다고 하니 조금 신경이 쓰이는구나. 


입소문으로만 도는 전설의 킬러가 있다고 하던데 그의 작전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지. 사비의 자전 속도 때문에 사람이 감으로 총을 쏴서 명중시키는 일은 불가능하긴 해. 총알이 휘어서 날아가니까 말이다. 휘어지는 각도를 섬세하게 계산해야 하는데, 그걸 인공지능도 아니고 사람이 육감으로 할 수 있을까?



#4. 초록

고모, 할... 할 수 있나 봐요. 연습이 반복될 때마다 총알 자국이 동심원으로 표시된 목표 지점에 점점 더 가까이 들어오고 있어요. 제가 입수한 킬러의 훈련 노트를 보니까 기계의 힘은 빌리지 않고 순도 100%의 육감으로 완전무결한 수제 기술을 완성해가고 있었네요?! 


그런데 여기서부터는 고모한테 제가 알고 있는 걸 알리고 싶지가 않아요. 뭔가, 지켜주고 싶어요. 이상하네. 말이 안 되는데, 난 이런 거에 왜 자꾸 끌리지?




#5. 서운관

초록아, 너는 꿈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꿈에 매료된 인간인 거야. 옛날부터 초경쟁시대라고 해서, 꿈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공허한 단어에 불과했다고 하더구나. 


꿈이 사라졌으니까 꿈꾸는 것이 오히려 동경의 대상이 되는 거지. 꿈을 훔쳐 여기까지 온 네가 킬러의 꿈에 또다시 공명한 것은 너도 꿈꾸는 것을 꿈꾸는 청년이기 때문이야. 


초록아, 하고 싶은 거 다 하렴. 나도 너를 응원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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