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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Mar 28. 2023

감정이 없는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

집사 스티븐스는 직업적 과업을 완벽하게 수행했던 프로 중 프로로 살아왔다. 그러나 한 때 명성을 떨쳤던 저택은 퇴락하여 스티븐스와 서너 명의 하인만으로 겨우겨우 꾸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스티븐스는 현재 주인의 권유로 생애 처음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행길에서 스티븐스는 집사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집사직을 수행하면서 해왔던 개인적인 노력들이 '텅 빈 허공처럼(<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309쪽)' 그의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스티븐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집사로서의 품위는 다름 아닌 개인적인 감정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감정의 동요가 없었으며 만찬을 무사히 마치는 것을 우선시했다. 또한 동료의 은근한 구애 또한 모른 척한다. 집사의 과업 앞에 불필요한 개인적인 감정과 실존 의지는 고집스럽게 삭제해 버리고, 오로지 집사로만 살아간다. 


또한 스티븐스는 세상에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도덕적인 주인을 모시는 일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세간의 다른 집사들과는 다르게 스티븐스는 주인의 재력만으로 일할 곳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은근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부심을 가지며 모셨던 달링턴 경은 사실 나치 지지자였으며, 뒤에서 나치를 지원했다는 등 사회적 평가가 엇갈리기 시작하자 스티븐스의 직접적인 철학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자신은 집사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고, 최고의 집사였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는 이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해설서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떠오르게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악을 돕고 악에 이용당하는 범인들의 삶, 그 소름 끼치는 관성의 폐해에 대해 말한다.

600만여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데 앞장선 전범 아이히만은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지닌 괴물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고 근면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스티븐스가 위대한 집사였다면 아이히만은 좋은 아버지, 자상한 남편, 성실한 직업인이었다. 계급과 편견과 차별에 길들여져 있었던 근대인의 조건은 고려해야겠지만, 결국 인간은 자신의 더듬이로 길을 가고 그 여정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325-327쪽) 



스티븐스의 여행을 따라가며 박경리 작가의 <토지>에 등장하는 김길상이라는 인물이 떠올랐다. 김길상은 최참판댁의 후계자인 최서희의 사업을 돕는, 사실상 그 집안의 집사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김길상의 행보는 스티븐스와는 달랐다. 


김길상은 마음 깊이 연민을 품고 살아갔다. 이 인물을 추동하는 것은 감정이었다. 김길상은 하인이라는 자신의 신분 앞에서 괴로워하고,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운명에 분개했던 시민이었다. 이후 그는 최서희를 떠나 독립운동을 했으며 이후 가택구금 상황에서도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한 백성을 생각하며 관음 탱화를 완성한다. 스티븐스는 이런 김길상은 어떻게 평가할까. 스티븐스는 말한다. 



언제까지나 뒤만 돌아보며 내 인생이 바랐던 대로 되지 않는다고 자책해 본들 무엇이 나오겠는가?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의 중심축에서 우리의 봉사를 받는 저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길 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321쪽)>



과연 그럴까?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고 선언한 흑인들, 투표권을 달라고 거리를 뛰쳐나온 여성들,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외쳤던 우리의 선조들, 이들 모두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고통을 느꼈고, 고통을 직면했고, 소리 내어 외쳤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고통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었다. 


나는 스티븐스에게 묻고 싶다. 감정을 삭제하고 삶의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고.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중략)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남아있는 나날, 민음사>'이라는 이 책의 아름다운 메시지가 내내 찝찝한 이유이다. 물론 완벽을 추구하는 스티븐스는 그 조언마저 흘려버리고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농담 연구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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