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 알베르 카뮈, 민음사)
알베르 카뮈의 문제작 <이방인>은 첫 문장부터 강렬하다. 이보다 센 첫 문장을 가진 작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이다. 게다가 주인공인 뫼르소는 어떤가. 엄마의 장례식을 꾸역꾸역 치르고 돌아온 뫼르소는 더위를 피해 찾아간 해변에서 마리를 만난다. 그녀와 함께 영화를 보고 자신의 집으로 함께 돌아와 밤을 보내기도 한다. 엄마 장례식을 치르고 난 다음날 여자 친구를 사귀어버리는 멘털이라니. 낯설고 이질적이다.
그는 '이방인'이다. 보통의 사람들과 달라서 이방인이며 자기 아닌 타자를 이방인으로 대하므로, 이방인이다. 그는 현실을 육체적인 감각으로 인식한다. 자신의 피부에 닿는 것, 눈에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등 육체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으로만 자신의 실존을 확인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육체적인 감각에 꽤나 예민하다. 뫼르소는 무려 피의 흐름까지 느낄 수 있었다.
뫼르소는 관념적이지 않으므로 사랑이나 자유와 같은 추상적인 언어를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같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네가 아니기에 타자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상상이나 추측만 가능하다. 따라서 타자의 삶은 관념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낯선 존재, 그것이 타자이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던 것도 어머니가 타자였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머니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알 수 없으며, 이미 물리적으로 다른 공간에서 살아왔던 어머니가 죽었다 한들 뫼르소의 삶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타자를 완전한 타자로 대하면서 그는 이웃들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는 기꺼이 이웃들과 어울린다. 이웃들은 그를 꽤 편하게 여겼는데 감정적으로 들쑥날쑥하지 않은 모습이 잔잔한 호수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즐겁게 살고 있던 뫼르소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시작은 햇빛 때문이었다. 빛에 대한 묘사는 1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전등이나 가로등, 뜨거운 햇볕으로 인해 압박감과 괴로움을 느낀다. 뫼르소가 고통을 느낄 때는 언제나 빛이 등장한다.
그는 단지 자신의 눈을 찌르는 것 같은 햇볕을 피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의 상대는 동네 친구를 위협하는 아랍인이었는데, 뫼르소를 향해 단도를 겨누자 반사된 햇볕이 정면으로 그의 눈을 찌른 것이다. 감각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뫼르소는 맹렬한 눈부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재판은 뫼르소가 소외된 채로 진행된다. 법률가들에게 그는 이해하기 힘든 이방인이며, 뫼르소를 사이코패스로 단정 짓고 심문이 진행되는 듯하다. 뫼르소의 혐의는 부풀려지고 죄의식이 없는 무심한 그의 모습에 법정은 경악한다.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감옥에서 깨어 있는 동안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거나 죽음을 상상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것은 그가 여태껏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관념적인 삶이었다.
그는 사형선고를 되돌리기 위해 머릿속으로 온갖 방법을 궁리하지만,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는 유한의 삶을 살아가는 사형수라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동시에 자신이 그렇듯 어머니도 죽어가면서 얼마나 살고 싶어 했을지를 이해한다. 죽음 앞에서야 삶을 향해 문을 열어젖힌 뫼르소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했을 뿐 예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죽음 앞으로 한 발자국 성큼 다가선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은 하루에 몇 분이나 될까. 삶을 유지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써버리고 우리는 정작 삶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매 순간 생생하게 살아있기. 그러기 위해 살아있음을 인식하기.
지금 이 순간, 나는, 당신은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