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햄릿>
형인 덴마크 왕을 독살하고 새롭게 왕이 된 클로디우스는 빠르게 국정을 장악한다. 왕비와 대신들 포함 덴마크는 큰 혼란 없이 선왕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듯 보인다. 오로지 햄릿만이 선왕을 애도하고 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데 그는 기회를 붙잡지 못했다. 햄릿은 유일한 왕세자임에도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더군다나 햄릿의 어머니인 거트루트 왕비는 클로디우스와 결혼해, 숙부가 갑자기 아버지가 되어버린 대혼란이 펼쳐진다. 햄릿의 슬픔은 길어질 수밖에. 때맞춰 아버지 선왕의 유령이 등장해 햄릿에게 독살의 비밀을 발설한다.
클로디우스를 향한 복수를 결심한 햄릿은 망설이고 또 망설인다. 유령이 된 선왕에게 들은 독살 사건을 연극 관람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기도하느라 무장해제된 클로디우스 뒤에서도 천국에 갈 기회를 주면 안 된다며 복수를 미룬다.
대신 칼을 입에다 물었는지 독설가로 변모하는데 어머니 거트루드와 연인 오필리어가 주요한 타깃이다. 동시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왜 클로디우스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될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복수를 망설이는가.
햄릿은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다. 약간의 상상을 더하자면, 선왕의 그늘 아래 말장난이나 하며 편하게 살아왔을 것이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클로디우스 앞에서 예의를 갖추는 거짓 연기초차 할 수 없었던 햄릿은 전략적인 왕세자가 아니라 범인에 불과하다. 햄릿은 국민에게는 인기 있는 왕족이지만 덴마크 궁 안에서 그의 정치력을 확인할 수는 없다. 그의 최측근인 호레이쇼와 호위병들 몇 명 만이 햄릿을 따르는 정도이다.
클로디우스는 다르다. 클로디우스는 자신의 정치력 아래 계산적으로 선왕을 독살했을 것이며, 준비된 대로 착착 선왕의 장례를 치르고, 온갖 명분을 만들어 왕이 되고, 결혼식을 거행하고, 국정을 장악하는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햄릿의 입장에서 클로디우스는 골리앗이다. 클로디우스를 죽이는 데 성공하더라도 그는 궁을 장악할 능력이 없다.
아버지의 독살을 증명하거나 자신의 복수를 지지해 주는 세력이 없다면 그 역시 명분 없는 살인자일 뿐이며 군주의 도덕성은 정통성만큼이나 안정적인 통치에 중요한 요소이다. 복수는 다이너마이트를 온몸에 묶고 자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누구보다 햄릿 자신이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무작정 떠날 수도 없었다. 왕의 역할은 햄릿에게 맞지 않는 옷이 분명하지만 왕세자는 왕세자니까. 햄릿은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클로디우스와 같은 지도자, 근본적으로 자기 확신이 부족한 햄릿과 같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와 국민의 비극이 아닐까 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답게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죽은 뒤 왕위에 오른 덴마크의 새 왕 포틴브라스는 부디 현명한 왕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