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하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났다. 국가와 학교의 도움으로 의무교육을 무사히 받았다. 공교육밖에 받을 수 없는 환경. 고등학교를 다닐 땐 선생님은 날 따로 불러 ebs문제집을 챙겨주셨다. 어떤 선생님은 교사용이지만 괜찮다면 가져가라고 했다. 닳고 닳을 정도로 본 ebs문제가 외국어 영역 제일 마지막 페이지 장문 독해와 똑같을 때의 쾌감이란. ebs 만세. 지문을 읽지도 않고 정답을 맞혔다.
빈털터리가 은행에 간다고 부자되지 않는 것처럼 대학에 갔지만 나는 빈곤했다. 역시 국가와 학교의 도움을 받으며 학교를 겨우겨우 다녔다. 소득분위를 따로 알아보지 않아도 장학금을 받았다. 분수를 잊고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동아리비를 낼 여유도, 알바를 땡땡이 칠만큼의 배짱도 없었다. 일주일도 안돼 나왔다. 그렇게 자발적 아싸는 학점에 목을 맸다. 학부별 상위 몇 명한테 주는 문상 20만 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학점 덕분에 기숙사에서도 1년을 살아봤다. 소속된 집단의 규칙에 몸을 맡길수록, 열심히 할수록 보상받는 기분이 좋았고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회에 나오자 어디서 쐈는지 모를 것에 풍선이 마구잡이로 터졌다. 규칙을 따르는데 왜 나는 이렇게 괴로운가. 열심히 일하는데 뭐가 그리 서러운가. 왜 매일 공허한가. 남들은 잘 다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초등학교 6년을, 중고등학교 6년을, 아니 대학교 4년을 무슨 정신으로 다녔는가. 왜 나는 돈을 벌고 있지만 돈이 없었을 때와 똑같이 최저가를 쫓아다니는가. 그때와 나는 뭐가 다른가. 회사를 다니는데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첫 단추부터 에러였다. 돈을 좇았어야 했다. 쥐뿔도 없으면서 어디서 본 건 많은 맹랑한 정신으로 회사를 다녔다. 2년 4개월, 2년 6개월, 교집합 없는 회사들의 나열. 이력서에 안 쓰느니만 못한 스쳐 지나간 회사들... 이겨낼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 그동안 어떻게든 해왔으니까 이번에도 견딜 거라는 무언의 자신감의 결과는 연달아 터지는 폭죽처럼 나를 좀먹었다.
일이 터지고 나서야 돌아본다. 규칙과 기준을 맞추는 걸 좋아했지만 사회 친화력은 낮았다는 걸. 자의로 혼자가 된 적도, 타의로 혼자가 된 적도 있었다. 정량적 평가에 급급하다 보니 정성적인 나 자신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31살이 된 나는 또다시 퇴사를 했다. 이전의 퇴사와 다른 것이 있다면 나이가 많다는 것, 1년 뒤 이사 걱정이 잊을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오는 것, 몸무게가 10kg 늘었다는 것 그리고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은 것.
30대의 첫 퇴사는 20대보다 더 대책 없다. 이직처도 없고 열정은 사그라든 지 오래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때도 돈이 없고 지금도 돈이 없다는 것. 어차피 돈이 없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나에게 유예기간을 주기로 했다.
앞을 생각하면 아득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왔으니 앞뒤 재지도 못한다. 누군가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라고 누군가는 조금 멀리 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현재를 보라고 한다. 나는 필름 카메라인데 자꾸 옆에서 망원렌즈, 단렌즈를 들이대고 있는 꼴이다. 지금에서라도 내가 필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디카처럼 결과를 바로 낼 순 없다. 멀리 있는 걸 찍으려면 내가 가야 하고 가까이 있는 걸 찍으려면 내가 물러서야 한다.
디카가 아닌 게 아쉽긴 하지만 필카 나름대로 열심히 찍으련다. 필름을 다 쓰면 그때 가서 현상하면 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결과는 나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