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국 비행기는 낮시간이었어서 여유롭게 오전에 집에서 나갔습니다. 공항으로 가기 전, 학교에 잠시 들려야 했어서 캐리어를 우버에 싣고 도로를 달리는데 햇살이 정말 따뜻했습니다. 새파란 하늘에 적당한 크기의 구름들이 해를 절묘하게 가려주어 감상하기 좋았어요. 학교에서 잠시동안 할 일을 한 뒤, 공항으로 가기 위해 학교 앞 대로에 서서 다시 우버를 기다리는데 매일 지나왔던 학교의 풍경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매일 보는 같은 시간대의 같은 장소인데도 내가 오늘 일본을 간다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굉장히 다른 장소로 변해 있었어요. 한 가지 변화만으로도 물리적 공간이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나의 정서와 상태를 알아보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의 학교 앞 대로는 훨씬 풍요롭고 다채로워 보였어요. 가기 전엔 꽤 힘들어했는데 막상 가려하니 나름 설레는 건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본 매일의 풍경은 이 정도로 다채롭진 않았는데?'
일본에 다녀오면 좀 더 기대하는 마음으로 출근을 해 봐야겠어요.
보스턴에서 타는 일본행 비행기는 어떤 느낌일까 꽤 설레기 시작했어요. 역시나 너무나 친절한 일본 직원분으로부터 티켓을 받고 근처 카페에서 라테를 받아서 잠시 걷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이따금씩 일본 학생분들이 보이긴 했는데, 일본을 가는 비행기치곤 탑승객이 너무 적어 보였어요. 공항 가장 구석에 있는 게이트에 앉아 기다리며 발표 연습을 잠시 한 뒤,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네 명이 앉는 가운데의 자리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운데 두 명이 비어있었어요. 긴 비행여정이 이번 여행을 망설였던 가장 큰 이유였는데 한시름 놓았습니다. 곧 출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오른편 끝에 앉은 승객이 대뜸 손을 슉하고 내밀며 인사를 했어요. 축구 경기 하기 전 주장끼리 악수하는 정도의 당참이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여정이 될 것 같네요.
장거리 여행에 JAL을 타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여러가지 중 특히 기내식과 영화 목록이 궁금했어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기내식을 받았는데 한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맛있게 먹었어요. 샐러드 하나하나가 색도 예뻤고 일본 특산물로 만든 것 같은 음료도 너무 달지 않고 맛있었어요. 기내식뿐만 아니라 뭐든 웬만하면 다 맛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는 아닐 겁니다. 영화 목록은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았어요. 그림을 소재로 한 일본 영화를 보는데, 왜 일본에는 무언가에 몰두하여 열정을 쏟는 내용의 콘텐츠가 많은지 궁금해졌습니다. 길진 않지만 일본에서 연구활동을 하며 느꼈던 경험으론, 사회문화적으로 무언가에 몰입하는 삶을 존중해 주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일상의 많은 이들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밌는 영화 목록을 살피다 오랜만에 인턴을 보았어요. 영화 속 은퇴한 노인인 벤의 첫 장면은 여러번 봐도 왠지 고느적한 감동을 줍니다. 벤은 자기소개 영상에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음악가들에게는 은퇴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이 사라지면 멈추는 것뿐. 제게도 아직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감동적인 대사예요. 벤은 왜 그렇게 다시 일이 하고 싶었을까요? 일본 여정을 준비하기 전, 대뜸 일에 대해 혼자 정의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
일을 한다는 건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같다.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그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게 혹은 사랑을 하게 됩니다. 벤도 일이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었을 겁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직속 상사인 줄스, 회사의 서비스를 통해 기쁨을 누릴 고객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사랑하지 않으면, 더 자세히는, 사랑을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눈을 깜빡이지 않는 걸 싫어하는 줄스를 위해 거울에서 열심히 눈 깜빡임을 연습하는 벤의 모습에서 사랑하는 노력이 느껴졌어요. 직장에서의 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단순히 상사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어요. 더 어렸을 때는 의식적인 노력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생각이 변했습니다. 사랑하겠다는 의지만큼 큰 사랑이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이번 발표를 통해 청중을 최선을 다해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OST를 반복해 듣고 있는데, 착륙 안내 방송이 들렸어요. 멀리 있는 창밖으로 보이는 일본 하늘의 햇살과 영화 속 벤과 줄스가 서있는 공원의 햇빛이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