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9.24
어릴 때는 장미가 그렇게도 좋았었다.
화려한 자태며, 매혹적인 향기며, 하다못해 도도한 가시까지도 내겐 너무 황홀했다.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그 까칠한 아름다움을 내심 동경했던 게 틀림없다.
저렇게 되자고, 장미 같은 존재가 되자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물론, 내가 장미를 좋아하게 된 것은 만화 마니아였던 10대 소녀의 유별난 감수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 당시 너무도 사랑했던 <캔디>의 '안소니'가 가장 아끼던 꽃, 그리고 <유리가면>의 '보라색 장미의 사람'이 마야에게 마음을 전하던 꽃이었으니까.
어쨌거나 장미는 내게 그런 꽃이었다.
굳이 한 마디로 잡아내자면 '동경'의 이미지였다고나 할까....
나이가 좀 더 들고 옥상이 있는 집에 살게 되면서 작은 정원을 만들어 꽃을 심기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장미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 화려함과 도도함이 어느 순간, 아름답지만 이기적인 여자를 보는 듯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온몸에 가시를 드러낸 채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장미가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어디 꽃의 탓일까.
나이를 먹어가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서툴게 깨달은 내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그 무렵부터 작은 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혼자서는 빛날 수 없으나 한아름 모아놓으면 빛을 발하는 작은 꽃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카랑코에, 패랭이, 애기별, 종이꽃 등으로 가득 채워지는 정원을 보며 '그럼 그럼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런 거지'라고 인생의 진리라도 깨달은 양 으스대곤 했었다.
그런 내가 올해 처음으로 정원에 국화를 심었다.
꽃이라면 도감을 들고 이름을 외울 만큼 좋아하는 내가
유일하게 관심 없어하던 꽃.
단골 꽃집 주인이 함박웃음으로 권해도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하는 유일한 아이템이었던 꽃.
남들에겐 가을의 상징이라지만 내겐 그저 장례식장에나 어울린다 평가절하 되었던 그 꽃을
내 손으로 값을 치르고 사들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게 국화는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떠나는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꽃,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겨울로 가는 길목에 참 짧디 짧게 존재를 드러내는 꽃 ,
어쩐지 주연이기보다는 조연처럼 느껴지는 꽃.
그래서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꽃의 쓸쓸함을, 덧없음을, 소박함을 내 것으로 담아내기에 난 너무 젊고 뜨거웠으니까.
그리고 그 꽃이 쓸쓸하지도, 덧없지도, 소박하지만도 않다는 걸 발견해 낼 깊은 눈은 없었으니까...
이제야 난 국화의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마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국화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 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인생도 4계절이 있다면 난 분명
가을로 들어서고 있으니까….
그리고 국화는 그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꽃이기도 하니까.
내 작은 정원에 색색 아름다운 국화를 심으면서
이제 가을로 가는 길목에 접어든 내 나이가
'성실'과 '진실'과 '감사'라는 흰 국화의 꽃말처럼
소중한 것들을 소박하고 따뜻하게 담아내며
떠나는 사람을 안아주고, 남겨진 사람을 위로하는
진정한 성숙함으로 채워져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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