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만든 영화_02

장편독립영화 -1년간의 제작노트

by 구쩜사오

(영화 '미처몰랐던건' 시나리오 첫페이지)



딱 한번만 꽂히면 써진다


진짜 나는 그런 성격이다. 딱 한번만 제대로 꽂히면 순식간에 일을 해결한다.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였다. 떠올린다, 떠올린다! 딱 제대로 한번만!


그런데 이 시나리오란게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아무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냥 멍하니 컴퓨터의 워드 깜빡임만 보게 된다.


아 씨발.


일말의 감탄사를 외치고 나는 의자를 뒤로 밀었다.

막상 쓰겠다고 했는데 아무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냥 때려치자고 할까?

아니야. 그래도 해보자.


그놈의 '해보자'라는 마음이 문제다.

해보자하면 안된다. 아무것도.

싫어지고 귀찮아진다.


'아이고 죽겠다'


어른들이 익숙하게 외치는 한숨과 비명을 외치며 침대에 누웠다. 털썩.


내 방의 천장을 흰색이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또 아무생각이 안난다.

시나리오. 소재. 인물.

막막하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이것도 귀찮아지는 걸까.

이럴때는 잊어야한다.


그래서 난 컴퓨터를 끄고 나갔다.

헬스장가서 덤벨을 들고 런닝머신을 뛰고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 소맥을 기울였다. 아무생각도 안나게.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이 되서도 아무생각도 안났다.


미치겠네.


전기세만 낭비하느니 나가자. 그래 나가자. 또 나갔다.

도서관을 가서 박찬욱감독의 책을 읽고 드라마,영화 시나리오책을 읽었다.

시나리오란 뭔가? 근본에 대한 심도있는 책들도 읽었다.

읽고 나니 구성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그래 쓰면 되겠다 각오가 생겼다.


그리고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니 또 1시간이 그냥 흘렀다.


와 씨발.


이틀이 그냥 흘렀다.

이유가 뭘까? 난 왜 한 글자도 적지 못하는 걸까? 생각했다.

사실 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뭐에 대해 써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인지 죽음인지 액션인지 롤코인지 누가 나올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현실에서 찾기 힘드니 과거에서 찾기로 했다.


연애, 사실 연애는 가장 어렵다. 내 직업보다 더 모르겠다.

사랑이 하고 싶은지 가장 먼저 옛 연인들이 떠올랐다. 그때의 감정, 장소, 손길......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 연애에 대해서 쓰자.

영화에 나오는 연애말고 정말 현실적인 연애.

연애하면서 벌어지는 감정싸움,행복,섹스,가족,직업 그런걸 솔직하게 써보자.


그렇게 나는 '미처몰랐던건' 시나리오를 한자한자 써내려갔다.


영화의 기획의도에는 이렇게 썼다.


우리(남자)들은 '남자다움'을 중요시 생각한다.
남자의 자존심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높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표현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스스로 느끼는 자존감이다.
연애에 있어서 그 남자가 느끼는 자존감은
물질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인 명예 일수도 있으나
뭐니뭐니해도 중요한 건 생리학적인, 성적인 것이다.

그것으로인해 우리(남자)들은 살아있음을, 인정받았음을 느끼고
상대를 만족시켰음에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확인한다.

그것은 상대를 위한 것이라 하지만
어쩌면 우리(남자), 스스로를 위한 변명이거나
사실, 우리도 알고 있는 이기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런 성적인 부분에 대한 우월감, 자존감이
사랑에 있어서 상대를 행복하게만 한다면 좋겠지만,

사실, 여자가 바라는 것이 꼭 그런 것만 일까?

흔히 술자리서 장난으로 얘기하는
"야, 지루가 싫으냐, 조루가 싫으냐?" 에서 시작한 농담섞인 말이

남자는 단순히 그 행위 자체라면,
여자는 다른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남자)가 놓친 사랑의 어떤 부분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여자들이 항상 우리에게 실망하는 건 아닐까?

진정한 사랑에 대한 고찰
행위와 능력에 집착하는 남자들을 통해 찾아보고자 했다.


글을 쓰고 나니까, 어떻게 만들어갈지가 그려졌다.

그렇게 난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다.

딱 3일이 걸렸다.


(영화 홍보자료였던 스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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