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스런 영에게.
영은 언제나 영이었다. 1이 될 수도 있었지만 영은 1이 되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영은 영으로 평온하게 지냈다. 남극의 빙하 속에서도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에 바람에도, 아침에 막 비추기 시작하는 햇살 곁에도 영으로 존재했다. 과연 햇살 속엔 흰색을 넘어 투명함이 있었으므로 그것은 분명 영이었다. 영은 영으로서 지내는 것이 지루하지 않았다. 고인대로 부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무난하게 지냈다. 불행할 일이 없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행하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평온했다.
어느 날 봄바람을 타고 잔잔히 흘러가고 있는 영에게 아주 작은 먼지 티끌 하나가 붙었다. 티끌은 아주 작아 영인지 1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래도 분명 1이었다. 티끌은 영에게 외롭지 않냐고 물었다. 영은 영이라서 모두와 함께이기에 외롭지 않다고 물었다. 티끌은 영에게 갖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영은 영이기에 존재는 거추장스럽다고 말했다. 티끌은 영에게 남기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영은 영이므로 언제나 있었으며 없었다고 말했다. 티끌은 이런 말을 하는 영이 왠지 슬퍼 영을 안아주었다. 영은 영이기에 안을 수 없었지만 영은 티끌이 자신을 안아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티끌이 영을 안아주고 사라지자 영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영은 언제나 영이었고 존재가 된 적이 없었다. 존재가 되어 본다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아닐까. 존재가 되어 그것이 질린다고 해도, 언젠가는 다시 영이 될 테니까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은 무엇이 되어 볼까 생각하다가 모래알갱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모래알갱이가 되면 바람도 탈 수 있고 동물들에게 묻어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잘하면, 아주 운이 좋다면 달에도 갈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부풀었다. 영은 영이기에 지금도 달에 달 수 있었지만, 존재로서 달에 가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견고하고 명확한 존재로서 달이 되고 싶었다.
영은 모래가 되기 위해 모래알들에게 모래가 되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모래알 하나가 말했다.
'글쎄. 나는 원래 모래였으니 잘 모르겠는데.'
영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영도 원래부터 영이었던 것처럼 모래알도 원래부터 모래알이었던 것이다.
영은 존재가 되는 것을 관두고 바람이나 타면서 비나 마시면서 놀았다. 그러다가 밤이 왔는데 평소 때와는 달리 답답한 기분이 들어 다른 곳으로 날아가려 했다. 하지만 영은 나갈 수가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영은 영이 아니게 되어버렸기에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게 됐던 것이다.
영은 이제 존재가 되었다. 영은 어둠 속에서 열 달을 보냈다.
영은 사람으로 태어났다. 모래알이 되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인간사를 겪어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영은 이왕 존재가 된 김에 존재로서 살아보기로 했다. 인간은 별난 짓들을 많이 하니까 운이 좋다면 달에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은 그래서 자신이 속하게 드라마 속에서 배역을 맡아 살았다. 처음엔 영일 때처럼 그냥 있으니 살았는데 그렇게 살자니 괴로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영은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밥도 열심히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열심히 사는 것은 힘들었다. 몸은 부서질 듯 피곤했고 마음은 찢기듯 아팠다. 이를 안타깝게 보던 영의 고양이가 영에게 말했다.
'삶은 어차피 순간이니 그냥 즐기며 살아.'
영은 고양이의 말을 듣고 느낀 바가 있어 감독을 찾아갔다. 영은 감독에게 자신이 속한 드라마에서 그만 하차하고 싶다고 말하며 하차 후에 자신의 인생계획에 대해 말했다.
감독은 영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영은 드라마에서 하차하고, 그때부터 즐기며 살았다. 밥도 맛있게 먹고 놀이도 많이 하고 경험도 많이 쌓았다. 하지만 그러다가 돈이 떨어지자, 영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영에게 돈이 말했다.
'나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단다. 물론 많이 있거나 많이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 역시 영원하지는 않아. 이건 너가 가지고 싶은 것들 모두 마찬가지란다.'
영은 그래서 더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영은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기쁘기도 슬프기도 고단하기도 평온하기도 한 삶을 보냈다. 하고 싶은 일들은 모두 했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났으며 소중한 아이도 낳았다. 영은 즐기며 즐기며 살았고 나이가 들어 자신의 아이가 낳은 아이의 결혼식을 본 노년이 되었다.
영은 그렇게 살다가 존재를 마감하고는 가루가 되었다.
가루가 된 영은 하늘을 날고 날아서 달에 도착했다. 원래 계획과는 달랐지만 어쨌든 달에 도착하니 좋았다. 아직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영은 존재로서 달에서 보내는 시간을 더 갖고 싶기도 했지만 영은 어느새 자신이 다시 영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달은 영에게 존재로서의 경험은 어땠냐고 물었다. 영은 존재로서의 삶이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있었지만 꽤나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생각했다. 영은 그냥 웃었다.
영은 드라마 안과 밖에서 만났던 사랑하는 존재들이 보고 싶을 때면 언제나 그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영과 함께 행복했다. 영도 그들과 함께 행복했다. 영은 존재들 사이에서 존재들 멀리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영으로 지냈다. 언제 다시 존재가 될 지, 언제까지 영으로 지낼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영은 존재로서의 추억을 깊이 간직하며 즐기고 사랑하기로 했다. 그렇기에 영은 언제나 함께했다.
유튜브 '별극장'에 오시면 그림과 함께 낭독된 영상 버젼이 있습니다.
사랑스런 영이 당신에게도 사랑스런 영으로 남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