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07년 그날밤
띡똑
모르는 번호다.
오른손으로 핸드폰을 위로 민다. 화면이 켜지고 문자 내용이 뜬다.
<여은아, 나 해연이야. 나 지금 다시 가는중인데 내 슬리퍼 좀 정문으로 가져다 줄 수 있어?>
’뭐야.. 언제봤다고 부탁이야..
에효.. 아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 산책 겸 나가보지 뭐‘
<생각보다 일찍오네? 응 몇시쯤 나가면 돼?>
아까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하다 말고 신발장 문을 연다.
세번째칸이 해연이 신발이겠지. 책상 순서처럼.
연보라색 삼선 슬리퍼를 한손에 들고 나왔다.
아직 채 짙어지지 못한 저녁 하늘, 주황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진다.
‘우와.. 우리학교 정말 예쁘다…’
이제 매일같이 아침부터 밤까지 아니 내가 자고있는 새벽에도 내가 있을 곳. 그 곳의 어둠을 처음으로 거닌다.
2월의 마지막주, 사람도 풀도 풋내나는 시절.
아직 겨울이 남아있는 저녁냄새.
걸음을 걸을때마다 두뺨이 빨개진다.
움츠러드는 어깨.
문과대와 노천극장을 지나 고개를 내려오니 정문이 보인다. 세개의 문 중 왼쪽에 선다.
나는 세 개의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다 서울사람들 같다. 옷 매무새도 발걸음도 세련됐네’
둥그런 얼굴에 둥근 코, 옷깃과 소매가 닳아가는 옷을 입고 한손엔 남의 슬리퍼나 들고 있는 내 모습에 어떤 감정이 치고올라오려다 고개를 흔든다.
‘난 새내기잖아! 나도 곧 저렇게 예뻐지고 날씬해질거야. 나한텐 설레는 일만 기다리고 있어‘
눈은 사람들을 따라가며 머릿속에선 스스로의 모습을 생각하던 중, 어렴풋 정문 근처로 다가오는 작은 여자애의 실루엣이 보인다.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며 걸어오는 해연이였다.
괜시리 오래된 친구처럼 손을 번쩍 들고 반가운척을 해본다. 하지만 어색한 몸짓이다.
“해연아!”
“..?어? 정말 나왔네.
거절하기 어려웠나보네.
역에서부터 힐신고 걸어오면 정문서부턴 발 아플거같아서. 너 밴드는 없지? 아 뭐 기숙사 코앞이니까 가서 붙이지뭐. 이거봐 뒤에 다까졌어”
’…뭐야 나오라고 부탁해놓고 고맙다는 말도 없네‘
“어 여기”
나는 한손에 계속 들려있던 슬리퍼를 주인에게 건넨다.
“슬리퍼 잘 찾아왔네.
넌 목욕바구니 사왔어?“
”어 동네 구경도 할겸 나갔다가 사왔어. 한참 못찾고 걷다보니 이문역까지 갔는데 그 근처에 그런 가게가 많더라.
근데 이 동네 선재보다 더 오래된 동네같아. 길도 좁고 잡화상? 이런것도 많고 아무튼 좀 어수선해.“
”그래?“
”응 나 수능끝나고 서린역 근처에서 실기 준비했었거든? 근데 거기는 큰 빌딩에 도로도 넓고 도보도 넓고.. 엄청 오래되고 큰 나무도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어서 난 서울이 다 그런줄 알았는데 여긴 그냥 내가 살던 곳보다 더 시골같아“
”그런가.
…
저녁은? 먹었어?”
“어 기숙사 식당에서”
”넌 몇회권 끊었어?“
”나? 어.. 아침 저녁 하루2회권으로 끊었어 너는?“
”점심은? 안먹게?“
”점심은 공강시간도 일정치않고.. 그리고 과 애들이랑 같이 먹지 않으려나? 싶어서“
”그래? 밖에서 계속 사 먹는거.. 괜찮아?“
”어..?”
“아 아니 밖에서 계속 사 먹는거 돈 많이 들잖아.
기숙사에서 밥 잘 나오는데 나는 밖에서 굳이 먹고 오는애들 잘 이해 안 돼서. 기숙사가 어디 먼 곳에 있는것도 아니고 어디든 걸어서 5분, 10분이면 오는데.
…용돈 많이 받나보네?”
“아 아니 용돈 진짜 조금 보내줘서 안그래도 알바 구해야하나 싶었어. 아.. 그런가? 나도 담달부턴 3회권으로 끊어야겠다. 다음달엔 같이 먹자“
”그래 너 편한대로 해”
내가 가져다 준 슬리퍼를 신은 작은 아이와 난 애써 발을 맞추며 고개를 넘었다.
아직 공사중이라 임시로 만들어 밟을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는 철제계단을 같이 내려오며 해연과 이어지는듯 끊기는 대화가 오고갔다.
그날밤은 이 곳에서의 첫날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