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다 보니 같이 TV를 볼 때가 많았다. TV 보시는 걸 너무나 좋아하셔서, 집 구조 상 안방에 TV를 놓았기 때문에 나는 피곤한 몸을 쉬지 못하고 어머님이 그만 보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때 살던 집은 결혼 후 두 번째 집이었는데, 방이 세 칸이던 2층 전셋집(어머님과 남편이 이미 살고 있던)에서 내가 만삭인 때 급하게 이사를 온 이유는, 갑자기 주인집에서 집값을 올려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에, 교사인 며느리까지 들어왔으니 욕심이 난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돈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자존심 강한 우리 어머니는 만삭인 나와 함께 새 전셋집을 구해 그 집을 나왔다.
새로 이사 온 집은 2층 집의 아래층이었는데, 2층을 위해 계단을 화려하게 지어서 아래층에는 거실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낮에도 전등을 켜야 했고, 집이 사각형이 아니고, 1층 옆의 광을 만들기 위해 억지로 짜 맞춘 집이어서 모양이 요상했다. 안방은 어느 정도 컸으나, 작은방은 어머니 장롱과 화장대로 꽉 찼고, 거실은 내가 결혼 전부터 시누님이 주고 갔다는 낡은 골덴 헝겊이 덮인 'ㄱ'자 소파가 놓여 있었다. 좀 생각을 했으면 그 소파를 버리고, 작은 거실에 TV를 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언젠가 찾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버리지도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게 만든 것이다.
어쨌든 어머님 모시고 살 때 TV는 내게 좋지 않은 기억이 많다. 어머님 옆에 앉아 같이 보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으면 거실 소파에 누워있다가, 어머님이 작은방으로 주무시러 들어가시면 그때서야 온전히 잠을 잘 수 있었다. 가슴에 '화'가 많으셨던 어머니는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 여배우'에게 특히 욕을 많이 하셔서, 그 또한 나를 몹시 피곤하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많은 기억 속에 유일하게 잊지 못할 어머님 말씀이 하나 있다. 최수종과 하희라 부부가 나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었는데, 두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이면 다 알만한 잉꼬부부여서, 그날도 둘이 손을 꼭 잡고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 모습을 보시며 어머니는 "저렇게 좋을까?"라고 하시며, 몹시 부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쓰러움이 가슴 가득 올라왔다.
우리 어머님은 나이 열여덟에 두 살 더 많은 이웃 동네 부잣집 막내아들에게 시집을 가셨다. 가서 보니 시아버님과 형님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고, 처음 본 남편이라는 사람은 말이 어눌했다. 비록 학교는 못 다녔지만, 예쁘고 총명했던 어머니는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군대에 세 번이나 끌려갔다 돌아오신 아버님은 약간의 청각장애로 매를 많이 맞아서 그랬는지, 세 번째 다녀오실 때는 거의 시체가 되어 돌아오셨고, 귀는 고막이 터졌는지 완전히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수전증까지 생겨서 사회생활을 꿈도 못 꿀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현실을 받아들여 남편을 회복시키고, 시아버님을 정성껏 모셔서 시아버님께는 사랑을, 동서 형님께는 온갖 설움을 당하고 사셨다. 시아버님이 몸 져 눕게 되자, 그 병수발을 나이 어린 막내며느리가 다했고,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그 옆의 오두막 같은 작은 집으로 쫓겨나듯이 나오셨다고 한다.
그 이후 어머님의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뻔히 보이는 삼 남매의 미래가 속상해, 도전 정신이 강한 어머님은 삼 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수원으로 올라오셨다. 먼 친척 한 분이 수원에 터를 잡고 계셨다고 한다. 충청도에 계신 아버님께는 주말마다 다녀오는 식으로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사셨고, 내 결혼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어머님께 아버님은 버릴 수도 없는, 사랑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는, 그저 큰 짐이었다. 나는 태어나서 '화상'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어머님 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거의 과부처럼 살아오신 어머님 앞에서 우리 부부는 늘 조심했다. 잠을 자기 전까지는 방문을 닫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건 남편이 먼저 그랬고, 나도 남편을 따라 그렇게 했다. 최수종 부부의 그 달달한 눈빛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남편을 만나 열애에 빠졌고, 부부 사이가 좋았었기에 배우자와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상이 얼마나 행복한 줄 안다. 그런데 어머님은 그걸 누리지 못하고 사신 것이다. 그래서 어머님께 심한 시집살이를 했음에도 마음 한구석에 늘 짠한 마음이 있었다. 시어머님이 아닌, 한 여자의 일생으로 바라보면 어머님께 무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어머님이 말기 암 진단을 받으시기 전에, 당신 돌아가시면 시골 산소에 묻히신 아버님을 모시고 와서 수원 가까운 곳에 당신과 함께 모시라는 말씀을 유언처럼 하셨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들은 우리 부부의 말을 듣고, 아주버님이 용인 가족 납골묘에 두 분을 모실 수 있게 결정을 하신 것이다. 어머님의 한 많았던 이 세상에서의 삶은 6년 전에 끝이 났다. 하지만 어머님은 우리에게 '인내와 강인함과 책임감'이라는 큰 가르침을 남기고 떠나셨다. 그러기에 우리 부부나 우리 삼 남매는 어머님을 많이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님은 죽고 싶었지만, 죽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도망가고 싶으셨지만, 가족을 끝까지 먹여 살리셨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의 삶은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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