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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an 17. 2024

아버지의 큰사위

시어머님의 지인과 우리 동네에 사시던 중학교 선생님의 아내가 중매를 해서 남편과 선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에 초등학교 교사와 성당 주일학교 교사 역할을 하느라, 일주일이 꽉 차게 바빴었다. 나는 그날, 엄마가 분할로 사주신, 금반추가 달린 청색 엘르 원피스를 입고,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머리는 미용실에서 고데를 해서 내 모습이 제법 예뻤다. 나를 데리고 나간 엄마와 함께 수원의 팔달산 아래에 있는 석산 관광호텔의 1층 카페를 향해 걷고 있는데, 중간 키의 양복 입은 남자가 우리 앞을 지나 그리로 들어갔다. 그 남자가 훗날 내 남편이 되었다.


엄마와 나는 총각을 데리고 나온 아주머니(나중에 보니 우리 대학 선배님이셨다) 소개로 따로 자리를 마련해 앉았다. 상대방의 얼굴이 너무나 평범해서 좀 놀랐고(아버지나 두 오빠나 사촌 오빠들까지 미남들이 많았다), 대화를 하는데 나와 너무나 잘 맞아서 놀랐다. 그는 긍정 마인드로 씩씩하게 자기를 표현할 줄 알았고,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투철한 나처럼 애사심이 크게 느껴져서 마음에 들었다. 특히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집에, 형이나 누나의 아이들이 놀러 오면 라면을 이용해서 간식을 만들어 준다는 말에 많이 끌렸다. 나는 내 나름대로 세 가지를 갖춘 남자였으면 하고 바랐는데, 이 남자는 그래 보였다. 그 세 가지는, 휴머니스트, 감성, 지적 능력이었다. 남편과 30년을 넘게 살고 있지만, 이 남자의 세 가지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남편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저 여자가 오늘의 그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즐겁고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남자의 말에, 나는 "좋아요"로 쿨하게  승낙하고, 이어서 밤 9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후 우리는 매일 남문에서 만나 데이트를 했다.


선을 보러 나가서 사윗감이 마음에 쏙 든 엄마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점수를 후하게 매겨서 말했고, 아버지 또한, 가난하게 자랐지만 열심히 공부하여 대기업에 다니고 있던 사윗감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만난 지 한 달이 되지 않았을 즈음에 나는 감기몸살이 심하게 와서,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그의 회사로 전화를 했는데, 이 남자는 감기몸살약을 사가지고 우리 집을 갑자기 방문했다. 매일 밤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으니, 집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와 가족 모두는 깜짝 놀랐는데, 그 모습을 엄마와 아버지는 또 좋게 보셨다.


매일 만나서 데이트를 하다가 밤이면 아쉽게 헤어지는 게 너무 싫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준비했다. 남편은 아버지께 '결혼 계획서'를 출력해서 보여드렸고, 우리의 결혼식은 척척 진행되었다. 자식과 함께 살고 싶어 하신 어머님과 그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한 아들, 그리고 그것을 아무 고민 없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내가 있어, 우리 세 사람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고, 평생 어머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잘 살 줄 알았던 나의 결정이 얼마나 용감했던 것인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친정에 내색하지 않았던 나의 힘겨운 시집살이와 달리, 우리 부모님의 큰사위 사랑은 지극하셨다.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듯이, 제자를 사랑하듯이 아끼셨다. 선물 받은 양주가 있으면 큰사위가 등장을 해야 뚜껑을 여셨고, 엄마는 사위가 좋아하는 음식은 미리 챙겨놓았다가 꺼내셔서, 큰올케 언니가 몇 번이나 웃으면서 내게 고자질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시외할머니께 눈빛 하나의 상처가 없듯이 내 남편도 우리 부모님께 그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랬었기에 아버지 돌아가신 후 내 남편의 슬픔도 꽤 컸을 것이다. 청각장애를 갖고 계시고, 어릴 때부터 떨어져 살던 아버지여서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던 남편에게, 나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있으니, 아버지가 사랑했던 제자의 딸 결혼식에도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에 나와 함께 선뜻 참석을 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흘러 사랑했던 시아버님도 돌아가시고, 나의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후반부에 나를 극진히 사랑해 주셨던 나의 시어머님도 돌아가셨다. 그리고 나의 큰딸이 내가 결혼하던 나이 보다 몇 살을 더 먹었다. 몇 주 전에 큰딸이 내게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자기가 아기였을 때 내가 우유를 먹이는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에는 딸의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지난번에 집에 내려갔을 때 앨범에서 보고 찍은 사진인데, 생각해 보니 엄마 나이가 나보다도 몆 살 아래야."


그 사진과 글을 보니 코끝이 찡했다. 내가 보기에 아직도 아이 같은 내 딸인데, 그보다도 더 어렸던 내가 시어머님을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느라 마음고생이 참 컸었지. 그래도 첫아기가 너무나 예뻐서 비록 마른 얼굴이었지만, 눈빛에 사랑이 가득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또 시간이 흐를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내게도 사위와 며느리가 생길 것이다. 나는 또 자식 사랑하듯, 제자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할 것이고, 시간이 더 흘러 손주가 생긴다면 할머니가 된 내 친구처럼 '손주 바보'가 되어 있겠지. 산다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을. 이렇게 감사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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