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 원짜리 한 장 (2017.3.2 일기)

by 채수아

어머님이 내게 주신 오만 원짜리 한 장이 있다. 말기암 환자인 어머님을 뵈러 가야 하는 주말, 내 컨디션이 몹시 안 좋아 남편에게 대합미역국과 반찬 몇 가지만 들려 보내고 난 가지 못했을 때의 일이다. 갑자기 어머님이 남편에게 오만 원짜리 한 장을 주시더란다. 남편은 극구 사양하며 받지 않겠다고 뿌리치는데, "너 말고, 에미 주라고.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해." 그 말씀에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난 그 돈을 남편에게 받고, 너무나 귀해서 봉투에 담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받자마자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아까워서 쓸 수가 없다고, 그냥 간직하고 있겠다고 전화로 말씀드렸다.



우리 어머님은 평생을 가난하게 사셨다. 가족 먹여 살리는 게 어머니에게는 가장 큰 일이었고, 가장 힘든 일이었다. 어머니는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일을 가리지 않고 하셨고, 못하는 일이 없으셨다. 억척 여인으로 살아온 결과 삼 남매는 이 사회에서 당당히 살아가는 사람들로 성장했고, 어머님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친척들의 시선은 어느새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나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아주 작고 초라한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은 나를 보고 내심 '가장 시집을 못 간 사람'으로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친구집 어디를 가도 사는 모습이 나와는 달랐고, 시어머님을 모시고 산다는 친구 하나도 번듯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돈'에 대해 무관심했던 사람이기도 했고,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과 내 월급으로 집을 마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로 보이지 않았기에 그 부분에서는 스스로 당당하게 살았다.


시어머님께 난 '어머니 개인 금고'였다. 매달 드리는 돈 이외에도 목돈을 요구하시면 난 바로바로 드렸다. 한 번도 아까워하지 않고 드렸다. 또한 어머님이 혼자 가실만한 먼 친척의 행사에는 축의금이나 부조금을 봉투 세 개(삼 남매)에 돈까지 담아서 드리곤 했고, 그 돈은 내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시댁 형제들 몫이 아니라, 어머님 몫이라고 우리 두 사람은 무언으로 알고 있었다.


​내 생일에 어머님은 늘 10만 원을 주신다. 다른 형제들 생일에도 똑같이 주신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돈을 받은 적은 없었다. 내게 그 오만 원 한 장은 굉장히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어머님 댁에서 주말을 보내는 동안, 어머니는 내게 자꾸 뭔가를 주신다. 예쁜 냄비 받침도 주시고, 시장에서 산 고운 베개도 주시고, 천 원에 다섯 켤레라는 아주 작은 아기 양말도 하나 주셨다. 그 밖에도 비닐장갑, 검은 봉지 등이 있다. 나 또한 어머님 댁에 갈 때마다 음식 이외에도 예쁜 것들을 하나둘 가져간다. 작은 화분 두 개, 우리 삼 남매의 어릴 때 사진들, 우리 가족사진에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글씨로 쓴 내가 만든 종이 액자, 예쁜 행주들...


어머님과 사랑을 나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서일까? 만나서는 어머님과 더 많이 웃고, 만나지 않는 평일에는 '뭘 드릴까'를 자주 생각하고 산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어머니'라는 산을 넘고, 이렇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축복인가!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처럼 내게 진한 그리움으로 남으실 분, 나의 어머니, 나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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