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엄마는 전화로 내게 물었다. 난 목 디스크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당신도 나처럼 감기몸살이 걸려 고생 중이라고 하셨다.
살면서 엄마가 나에 대해 가장 맘 아파하시는 것이 있다. 내가 첫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은 후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퇴원해서 낮과 밤이 바뀐 아기를 안고 밤새 동동거리다 몸무게가 41킬로로 빠진 거였다. 난 신혼여행을 다녀온 첫날부터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엄마는 결혼한 딸 집에 자주 오지 못하셨다. 내가 근무한 학교가 친정 근처였기에 난
임신 중에 학교에서 갑자기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면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퇴근 후 먹고 오곤 했다. 그때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LA갈비구이'였다. 엄마가 제일 맛있게 만들어주셨던 음식.
난 미련 맞게도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에 가지 않았다. 갈 계획이 있었지만, 미역을 사다 놓고 이것저것 준비를 하시는 시어머님이 혹시라도 서운해하실까 싶어 내가 살던 집에 그냥 머무르기로 결정했다. 어머님은 '아기가 백일 동안 엄마 품에서 자야 평생 건강하다'는 옛 말씀을 강조하시며 밤에는 절대 아기를 돌봐주시지 않으셨다.
아기가 호흡이 불규칙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난 진통 9시간 만에 제왕절개로 아기를 출산했다. 아기를 낳은 지 8일 만에 퇴원을 했지만 배 절개 부분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다. 아기는 집에 간 첫날부터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 시어머님이 깰까, 남편이 깰까, 난 아기가 울지 않도록 밤새 아기를 안고 동동거렸다. 두 달이 지났다. 결혼 전 47킬로였던 내 몸무게가 41킬로로 빠졌다. 피골이 상접한 폐병 환자의 모습이었다. 몸이 휘청휘청했다. 난 시어머님께 아기를 봐달라고 말도 못 하고 그렇게 두 달이 지나갔다. 우리 어머니는 친구와 나물을 캐러 가신다고 아침에 나가 저녁이 다 되어 돌아오실 때도 있었다. 아기 보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나는, 식사 때가 되어도 아기가 보채서 밥을 먹지 못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렇게 미련 곰탱이처럼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두 달 산휴가 끝나고 학교로 복귀했다. 살이 쏙 빠진 나를 보고 동료 교사들이 깜짝 놀라며 하는 말이, 산모가 부어서 오는 건 봤어도 이렇게 비쩍 말라서 돌아온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일주일 후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우리 집에 오셔서 시어머님께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으니 방학 동안만이라도 좀 쉬세요. 산모와 아기를 제가 돌볼게요."
엄마는 친정집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자던 방으로 나를 쫓으시고, 아기를 엄마가 끼고 사셨다. 나는 몇 날 며칠을 실컷 잠만 잤던 것 같다. 겨울방학 동안에 엄마는 몸무게가 4킬로 빠졌고, 백일 3일 전이 되어서야 아기는 밤에 잠을 제대로 자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 당시를 떠올리며 아직도 가끔 분노를 느끼신다.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늘 몸이 아팠던 것에 대한 분노까지. 그래서 난 엄마 앞에서 말조심을 하게 되고, 내 힘든 상황을 숨길 때가 많았다. 엄마는 아직도 어머님이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신다. 내가 친정 식구들에게 아직도 말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엄마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어머니에 대한 말을 꺼내는 순간 난 눈물이 와르르 쏟아질 것 같았고, 계속 그런 대화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시어머님 병간호로 내가 자주 아프고 지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계속 전화를 해서 내 몸 상태를 물을 것이고, 그게 나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가 될 것 같았다.
지난 추석 이후, 난 거의 매주 주말이면 어머님과 시간을 보냈지만 친정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겨우 구정 때 하룻밤 자고 온 게 다였다. 그래도 며칠에 한 번은 엄마에게 안부전화를 하지만, 내 결혼 이후 살아온 초점이 늘 시댁이었듯이 여전히 지금도 그렇다.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고 화목했던 친정과 달리, 가난하고 상처 많은 시댁에서 난 뭔가를 하려고 발버둥을 치며 살았다. 그래서 건강을 잃었고, 나 또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17년의 고통, 그리고 분가 후 어머님께 받았던 기적 같은 사랑, 그리고 어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된 지금의 애처로움.
"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어떻게 살래?"
난 이 질문을 가장 많이 받는다.
'글쎄, 어떻게 살까?'
몸과 마음이 와르르 무너질 때까지 견딘 내 시집살이를 칭찬해 주고 싶지는 않다. 내 '분가'를 치료법으로 주신 의사 선생님 말씀처럼, 난 정말 나를 사랑할 줄 몰랐다. 그분이 말씀하셨던 '자기 학대'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좀 더 지혜가 필요했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남편도 더 지혜로웠어야 했다. 어머님과 온전히 화해가 되고 깊이 사랑하면서도 내가 가끔 느끼는 울화 속에는 남편에 대한 분노가 숨어있다. 그래서 그 분노가 남편을 힘들게 하기도 한다. 당신은 왜 아주버님처럼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냐고, 왜 그렇게 아파하는 아내를 방치했냐고, 나를 끔찍이도 아끼셨던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 죄송하지도 않냐고...
모든 상황이 나를 그렇게 몰아갔다고 바보처럼 억울해하다가도, 결론은 그 모든 것이 '내 선택'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살면서 누구를 원망할 것이 없는 것인데, 나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