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수아 Apr 22. 2024

그냥 들어주는 사람

"언니, 저... 힘든 속 이야기해도 되나요?"


오래전, 한 달에 한 번 새치 염색을 하러 다니는 미용실에서 갑자기 들은 말입니다. 저는 직장인이라 평일 저녁 시간에 미용실에 들르곤 했는데, 그 시간에는 사람들이 거의 오지 않았습니다.


"해도 되지. 말해 봐."


그렇게 우리는 드러내기 힘든 속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미용실은 쌍둥이 자매가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병이 다섯 가지나 되는 엄마, 이혼해서 남매를 데리고 들어온 남동생까지. 오래전부터 그 자매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며 살았습니다. 초등 교사였던 제게는 조카들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자주 물었습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여동생까지, 그 자매는 신경 쓸 일이 많은 부모 같았습니다.


저는 그 이후 셋째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했는데, 갑자기 아기가 고열이 나는 응급상황에 저와 함께 병원에 같이 가자고 부탁할 정도로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사랑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입주하면서 우리는 헤어졌고, 그 이후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만남을 이어왔습니다. 제가 아끼는 동생들이라 결혼하여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으나, 쌍둥이 중 언니는 아내에게 얹혀살려고 작정한 건달을 만나 반 년 만에 이혼을 했고, 큰 상처를 받은 후 마음씨 좋은 이혼남을 만났습니다. 부부 사이는 좋지만, 만신(무당 비슷한)인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아 사람들을 잘 만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 동생은 그동안 만난 적이 없습니다. 친정 식구들과 연락하면 부정 탄다고 전화도 못 하게 한다는군요 ㅠ ㅠ


그래도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동생과는 꾸준히 만나고 있는데, 술을 안 마실 때는 말 없는 사람이 술만 마시면 싸움을 걸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나쁜 술버릇이 있는 남편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낳은 쌍둥이 딸은 벌써 초등학교 6학년 생이 되었고, 이 동생은 부업으로 조금씩 돈을 벌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했던 그 동생이 지금은 '섬유 통증'이라는 처음 듣는 질환으로 계속 병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지난주에 갑자기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그녀의 남동생의 스물세 살 딸을 생각하여 부의금을 봉투에 넣어가서 주었습니다. 늘 습관적으로 돈 봉투를 챙길 때에는 구겨지지 않게 책 사이에 봉투를 넣었습니다. 그때 읽고 있던 「치유」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동생은 책에 관심을 보이며 물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제목처럼 토닥토닥 나를 치유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만날 때보다 한결 밝아진 얼굴을 한 동생과 깊은 포옹을 하고 헤어지는 순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동생도 눈물이 핑 돌며 사랑한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참 많습니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는 사람의 수가 더 늘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이전 23화 엄마는 엄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