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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un 02. 2024

트라우마

여름이 왔나 보다. 아직 선풍기와 에어컨을 켤 정도는 아니어서, 며칠 전부터 맞바람을 치게 해 적당히 상쾌했다. 오늘도 그랬다. 공기의 시원함을 느끼며 음식 만들기에 관심이 많은 남편과 함께 김치를 담갔다. 마치 즐거운 놀이 같다. 총각김치가 익으면 꽤 맛있을 것 같다고 서로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몇 분이 지났을까. 갑작스러운 바람에 문이 쾅, 세게 닫혔다. 남편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맞바람 쳐서 그런 거지, 뭐."


내가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져서, 주섬주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산책을 나갔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한 시간 정도를 걸었다. 걷는 도중에 마음의 정리가 잘 되고 있었다. 모시고 살던 시어머님의 오랜 습관 중 하나가 그거였다. 갑자기 소리를 크게 지르시는 습관! 둘째 아이를 임신해 만삭이었을 때의 일이다. 아마 내 여름방학 기간이었을 거다. 어머님 밥을 푸고 이어서 내 밥을 푼 후에 주걱을 밥통에 넣은 채 밥통 뚜껑을 닫았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닫자마자 어머님이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 난 순간 심장이 심하게 벌렁거려, 나도 모르게 어머니께 한 말씀을 드렸다. 임신 중이니 소리 지르시는 것을 좀 조심하셔야 한다고, 이렇게 엄마가 심장이 떨리는데, 아기가 얼마나 두려운 마음이 들겠냐고. 모시고 살던 17년 동안 어머님의 습관은 그대로셨고, 나는 자주 심장 떨림을 경험하곤 했다. 그것이 내 건강이 나빠진 이유 중 한 부분을 차지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습관은 보통 고치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분가 이후 갑자기 온유한 천사로 바뀌신 어머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내게는 그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지금도 하늘나라 어머님을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는데, 오래전에 쌓인 괴로움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그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내 심장은 솜방망이질을 치고, 거기에 보태어져 에너지가 급다운이 되곤 했다. 그래서 나름, 호흡법이나 명상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힐링 산책이 좋은 치료법이 되기도 했다. 한참을 걷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기껏 열심히 청소를 해도, 잘했다는 칭찬 한 마디 없이 야단을 맞아 몹시 속상했다는 아이의 모습. 내 두 곱절의 세월 속에 남편 또한 어머님의 그 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많이 싫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조건반사적으로 어머님과 똑같은 행동을 때때로 하며 깜짝깜짝 놀랐으리라.


서로의 단점을 알면서도 서로 감싸며 살아온 세월이 보인다. 우리는 긴 세월 동안 따뜻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꽤 많이 노력해 왔다. 인생의 동반자로 걸어가면서 한 사람이 힘이 빠질 때면, 옆에서 손을 꼭 잡아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기에 가끔 튀어나오는 트라우마도 살짝 비껴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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