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타리 김치를 이렇게 담근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의 일이다. 요리사로 근무를 하는 시누님이, 함께 일하는 언니가 준 알타리를 다듬을 시간이 없자 시어머님께 다듬어만 달라고 부탁을 했다. 꼼꼼한 성격의 어머님은 정성스럽게 알자리를 다듬은 후에 알타리 하나하나를 사진 속 이런 모양으로 잘라 놓으셨다. 큰 김치통으로 한가득 알타리 김치를 주면서 시누님은 '이렇게 알타리를 쫏아놓았다'고 어머님 흉을 보았다. 음식 솜씨가 기가 막힌 시누님의 알타리를 맛있게 먹는 동안, 나는 유치원생이 놀이를 한 듯한 창의적인 가지각색의 모양들이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에 어머님은 말기 암 진단을 받으셨고 9개월을 힘겹게 투병하시다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 기간에는 알타리 김치를 담근 기억이 없다. 아마도 매일 병원에 들르는 일상이니 김치 담글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어머님 돌아가신 후, 나는 거리를 다닐 때 눈물바람이었다.
'저건 어머님이 좋아하셨던 색깔이야. 저 할머니가 입으신 옷, 우리 어머니 옷이랑 비슷하네. 저건 어머니 좋아하시던 과일, 저건 어머님이 싫어하시던 음식... 밥맛이 없어서 동네 단골 분식집에서 몇 가지를 주문한 후 계산을 하려다가, 그때의 내 심정을 말하니까, 사장님께서 다 안다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셨다. 시어머님과 친정 엄마가 한 달 사이에 돌아가셔서 자기는 오랫동안 그 슬픔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노라고.
어머님 돌아가신 지 곧 7년이 다가온다. 어머님이 떠나신 이후 알타리 김치를 어머님처럼 쫏아서 담그고 있다는 건, 아마도 어머님이 그립다는 내 마음의 표현이리라. 어머님과 똑같은 맛을 내는 된장찌개, 몸이 피곤할 때를 제외하고는 밥상을 정성스럽게 차리는 습관, 가끔 시장에서 어머니처럼 알록달록 예쁜 옷을 고르고 있는 나! 어제도 만 원짜리 푸른색의 여름 스커트와 5천 원짜리 집에서 입는 작은 꽃무늬 원피스를 사 왔다. 다시 봐도 예뻤다.
"에미야, 이것 봐라. 시장에서 5천 원 주고 사 왔다. 이거 너 입을래?"
나는 어머님이 사주신 옷을 몇 번 받았지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어머니 보시라고 자주 입고 있었다.
가난한 집의 장녀로 태어나, 열여덟 나이에 이웃 동네 막내며느리로 들어가 홀시아버님을 7년이나 모셨던 분! 집안의 가장으로 살면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고 내게 말씀하셨던 분! 그분은 이 땅에서의 맡은 바 책임을 피하지 않으셨고, 전투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다.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유명인들을 접할 때면, 난 돌아가신 시어머님 얼굴이 떠오른다. 비록 무학이셨고 거칠었지만, 당신이 이 땅에서 하실 일을 기꺼이 하셨던, 참 위대하신 삶을 살다가 떠나신 우리 어머니! 어머님은 내 가슴 안에 늘 살아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