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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수아 Jul 16. 2024

셋째 아이와 복직

서른다섯에 난 셋째 아이를 임신했다. 평소에 그리 건강하지 않았던 나의 임신 소식은, 축하보다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스스로 당당해지고 기뻐하기 위해 난 새 임신복 두 벌을 샀다. 두 아이 임신했을 때 입었던 좀 낡은 임신복이 이미 있었지만. 잘하지도 않던 화장도 뽀샤시하게 하고 출근을 했다. 난 예쁜 임산부였다. 내 모습이 예쁘다고 칭찬해 주던 선배 언니는 몇 달 후에 둘째를 임신하기도 했다. 터울이 13년인 둘째 아이를 말이다.


서른여섯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둘째 때처럼 육아휴직을 했다. 전업주부가 되어 세 아이를 키우면서 체력이 늘 달렸다. 그래도 그 시절이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했다. 육아휴직 3 년이 끝나갈 무렵에 나는 선생님의 길보다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의 삶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학교에 가서 사표를 썼다. 내게 교사가 천직으로 보인다고 말씀하셨던 교무부장님께서 심하게 반대를 하셨다.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마음을 바꾸라고 하셨다. 난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며칠 후에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교육청에 냈던 서류가 잘못되었으니 다시 서류작성을 하러 나오라고 하셨다. 학교에 가서 보니 완벽하고 꼼꼼하신 교무부장님께서 큰 실수를 하셨던 것이다. 나는 다시 서류를 작성하려고 하는데, 교무부장님께서 내 발목을 잡는 말씀을 하셨다.


"채 선생, 이건 하늘의 뜻이야. 내가 이렇게 서류를 잘 못 작성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야. 채 선생이 다시 학교로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그 말씀에 난 사표 대신에 '복직원'을 쓰고 말았다.  복직을 한 후, 열정과 함께 몸의 피로가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그나마 펄펄 날다가 파김치가 되어 집의 현관문을 열곤 했다. 나를 기다리던 세 아이를 사랑해 줄 방법은 많이 알고 있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당시 우리 막내는 제일 좋아하는 놀이 기구를 타자고 퇴근을 한 내 손을 잡고 매일 졸랐었다. 내게 그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서 둘이 앉아 '흔들이 놀이 기구'를 타고 있으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지금은 키 170cm의 사회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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