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나서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두 형제의 말 없는 모습이었다. 형님과 내가 수다를 떨며 명절 분위기를 내지만, 두 남자의 묵직한 분위기는 늘 이상했고 어색했다. 왜 그러느냐고 남편에게 물었더니, 아주버님이 '형님'이라기보다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각인이 되어 있어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시아버님은 사회생활을 못하시는 장애인으로 시골에서 요양생활을 하셨고, 시어머님이 시골을 왔다 갔다 하며 아버님을 챙기시면서, 삼 남매를 투쟁하듯이 억척스럽게 키워내시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아주버님이 맡아서 하신 거였다.
나이로는 일곱 살 위였지만, 늘 어려운 대상이었던 것이다. 장사로 늘 집을 비우시는 어머님 대신 시누이 형님은 엄마 역할을 했고, 아주버님은 두 동생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
아주버님은 지금까지도 나를 대하실 때에 동생 댁이라기보다는 며느리를 대하듯 하신다.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대학 입시 준비를 잘하고 있는지, 결과는 어떠한지, 외국에 계실 때도 내게 자주 전화를 해 주셨지만, 동생에게 따로 전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를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 나도 남편에게 잔소리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버님이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남편의 회사 사정을 다 꿰뚫고 계셨다. 어떤 분이 사장님으로 새로 오셨는지, 남편의 직책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회사 조직개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회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아주버님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말수가 적으신 분이 술이 좀 들어가시면 말이 많아지시고, 농담도 잘하시고, 잘 웃으신다. 집안 모임 때면 벌떡 일어나셔서, 우리 가족 모두가 너무나 소중하다고, 다들 건강하게 잘 살자고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그 순간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돌곤 했다.
참 열심히 살아온 인생들이다. 삼 남매를 전투적으로 키워내신 어머님과 어깨가 참 무거웠을 아주버님, 그리고 지금도 야간대를 다니면서 요리사 일을 하고 있는 시누이 형님, 그리고 성실함과 인간미가 넘치는 막내인 우리 남편!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지라 온 내게, 시댁 식구들의 열심함과 성실함은 나의 또 다른 공부거리였다. 자기의 삶을 피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낸 사람은 그 자체로 참 멋지고 당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