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하고 나니, 새로운 인연이 참 많이도 생겼다. 남편과도 그렇지만, 어쩌면 그로 인해 맺어진 인연이 더 기막힌 게 아닌가 종종 생각할 때가 있다.
동서 형님 한 분을 보더라도 참 특별한 인연'이 아닌가! 다른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 집의 며느리가 되어 같은 인연들을 만나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고민을 하고... 언젠가 형님과의 데이트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며 웃은 적이 있다. 그런 인연들 중에 내게는 감사하고 또 감사한 분이 계신다.
그분은 바로 나의 시외 할머님이시다. 할머니는, 내게는 좀 힘들 수 있는 '시어머님'의 친정어머님이신데, 충청도 대천에 있는 집에 사시다가 결혼 안 한 손주들을 몇 년 돌보시느라 수원에 올라와 계셨다.
내 걸음으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사셨는데, 손자며느리가 귀여우셨던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셨다. 어찌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텐데, 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할 정도다.
지금은 결혼한 지 30여 년이 지났으니 어느 정도 음식을 잘 해내는 편이지만, 그 당시 새댁이었던 나는 음식 하나를 제대로 못했었다. 남편은 '아내 사랑'으로 맛있다 하며 먹어 주었지만, 할머니 입맛에는 턱없이 부족했을 텐데도 항상 맛나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특히 '잡채'를 자주 해 드렸는데, 아주 맛있게 드셨고(내가 정말 맛있는 줄 알 정도로 ㅎㅎ) 그 이야기를 당신 자식들에게 과대포장하여 말씀하셔서 시댁 어른들께 '잡채'에 관한 칭찬을 황송할 정도로 많이 듣곤 했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다. 월급을 타면 매달 할머니께 조금씩 드렸는데, 그날은 두어 번 거절하시는 게 아니라 심하게 내 손을 뿌리치셨다. 많이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할머니, 왜 그러시는데요?" 하고 여쭈었더니, "너 방학인데, 월급도 못 타면서..."라고 하셨다. 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할머니, 선생님은 방학을 해도 월급을 줘요."
"그러냐?"
지금도 나를 웃게 만드는 행복한 추억이다. 그렇게 나와 몇 년을 자주 만나시다가 할머니는 시골로 내려가셨다. 큰아들과 큰며느리가 있는 할머니의 집으로. 그래서 그 이후로는 방학 때마다 가끔 뵈는 정도였다.
떨어져 있어도 늘 나를 사랑해 주는 그분의 존재로, '사랑은 저렇게 하는 걸 거야.'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도 내 귀에 들리는 듯한 소리!
"지혜 에미야!"
늘 그리운 분이다. 내게 그리도 따뜻하셨던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한 건,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여름방학이었다. 시댁 가족들 모두 시골에 내려갔다. 내가 뵌 할머니들 중에 가장 미인이셨던 할머니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작아져 있었다. 손목이 나의 반 정도나 될까? 사 가지고 내려간 고운 모시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은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밤이 되었다. 할머니 옆에서 손을 잡고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갑자기 일어나셔서 이불장 이곳저곳에 손을 넣어보셨다. 그러시더니 꼬깃꼬깃한 봉투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애들 은수저 하나씩 해 줘라."
난 순순히 할머니의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목에 걸려있던 금목걸이를 빼서 할머니 목에 걸어드렸다. 다음날 아침 할머니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본 시댁 어른들께서, 그대로 두면 나중에(돌아가시고 나면) 처치 곤란하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목걸이를 빼서 내 목에 걸었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시간들이 끝나가고 있었다. 얼마 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할머니는 '진한 사랑'이었다. 할머니가 주셨던 봉투가 생각난다. 얼마나 오래되었으면, 얼마나 만지작거렸으면 봉투가 닳고 닳아 가루가 일어날 것 같았던, 모서리는 닳다 못해 작은 구멍이 나 있던 할머니의 봉투. 그 안에는 5만 원이 들어있었다. 누군가에게 받았는지, 아니면 따로 담아 놓으셨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게 주신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언젠가 나도 할머니가 되면 그런 사랑을 할 줄 아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