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의식'에 대하여
눈이 내렸구나.
도로는 젖어있었다. 눈이 미처 쌓이지도 못하고 녹아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저 나무 위엔 소복히 눈이 쌓여있었다. 말라버린 잎새를 눈은 적시고 있었다. 길가에 휘청거리던 낙엽 위에도 눈이 앉아 있었다. 눈은 아직 살아있는 것들 위에만 앉아있었다.
또 겨울인가. 김신은 가까스로 날짜를 기억해냈다. 눈을 보기 전까진 늦가을이겠구나, 하고 생각해왔을 뿐인데 어느새 첫 눈이다. 초겨울이라 해도 되겠다. 낙엽 위에 눈이 앉았으니 오늘은 늦가을이고, 또 초겨울이다.
새벽 1시. 병원 주차장은 한산했다. 김신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몇 명을 살려냈을까. 오늘은 몇 명을 살리지 못했을까. 김신은 기억을 더듬었다.
13명. 오늘 김신이 맡은 응급환자의 숫자다. 4명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나머지 9명은 살리지 못했다. 타율로 치면 3할0푼7리. 나쁘지 않은 숫자. 그러나 김신의 기분은 좋지 않다. 김신은 엑셀을 세게 밟았다.
K는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병원에 실려왔을 때 이미 왼쪽 갈비뼈가 심하게 부서져있었다. 심장에 되돌릴 수 없는 타격이 갔다는 얘기다. 복부에는 파편 7개가 박혀 있었다. 과속으로 숨진 K 생각을 하자 김신은 자신도 모르게 엑셀에 올려놓았던 오른발을 슬쩍 들었다.
그렇다면 J는 정말 살릴 수 없었던 것일까. 건물 3층에서 충동적으로 뛰어내렸다는 J.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칠 때 가장 먼저 떨어진 건 어깨였다. 그 다음이 후두부에 충격이 갔을 것이 분명하다. 어깨뼈는 세 동강 나 있었으나 후두부는 괜찮았다. 아니, 괜찮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미상의 이유로 J는 깨어나지 못했다. 김신은 진료기록에 J의 사망원인을 '물리적 충격으로 인한 뇌손상'이라고 적었다.
내가 오늘 죽인 사람만 8명이야.
병헌의 말이 기억났다. 퇴근 전에 옥상에서 만난 병헌. 병헌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병헌의 흰 가운엔 검은 담뱃재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자책감에 시달릴 때마다 담배를 피워서였다. 병헌의 폐는 환자가 죽어갈 때마다 상해갔다. 오늘 병현의 타율은 4할2푼8리. 한국프로야구 최고타율인 4할1푼2리보다 높았다. 그러나 그건 병헌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살리지 못한 것과 죽인 것은 다른가. 그건 확신하지 못한다고, 병헌은 말했다. 무엇이 의사 책임이고, 무엇이 의사 책임이 아닌가. 사람들은 죽음과 삶이 0과 1의 차이 처럼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응급실에선 죽은 환자가 살아나기도 하고, 살아있던 환자가 죽기도 한다. 의사들은 살리지 못한 것과 죽은 것을 구분하지만 숫자는 말한다. 14명 중 8명은 죽었다고. 결과는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병헌에게는 살리지 못한 환자는 자신이 죽인 환자다. 늦가을과 초겨울, 살리지 못한 환자와 죽은 환자는 동의어일지 모른다. 승용차는 굉음을 내며 빈 고속도로를 달려갔다.
김신에게는 소송이 3건 걸려있다. 2명은 죽어버린 사람.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 나머지 1명은 죽어버릴 것만 같은 사람. 떨어져 있는 낙엽처럼 끝이 정해져 있는사람. 그 사람 위엔 아마 흰 눈 같은 죽음이 덮일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김신은 3명의 죽어버린 사람의 가족들과 소송을 벌이는 의사가 될 것이다.
병헌처럼, 할아버지에게도 살리지 못한 환자는 자신이 죽인 환자였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시도하는 것과 시도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말하곤 했다. 김신이 그날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4명은 살았을까.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열 번의 비난을 감내하는 게 의사의 일이라고 할아버지는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환자의 목숨을 살리는 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손자의 이름을 신이라고 지었다. 환자에게 의사는 신이다. 신은 권능을 지닌다. 할 수 없는 일이 없다. 그런 신이 사람을 살리지 못한 건 직무유기라고, 유족들은 쏘아붙이곤 한다. 김신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여권에 쓰인 영문 이름을 생각해냈다. KIM SIN. 신은 애초부터 죄(Sin)였을 지 모른다. 죄인 것을 알고서도 해야하는 일. 그게 할아버지가 했던 일이다. 김신도 그 길을 택했다.
아침 6시.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진 지 4시간 남짓. 샤워를 마친 김신은 집을 나섰다. 눈은 모두 녹아 있었다. 도로에도, 낙엽 위에도 눈은 없었다. 세상은 축축한 물기만은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늦가을이 된 것 같았다.
오늘도 김신은 누군가를 죽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김신은 차를 몰고 병원으로 향한다.
<끝>
이 소설은 아래 기사와 에세이를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3110166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0962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