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머무는 집

우리가 기억하는 장면은 늘 공간 속에 있었다

by 오륜록



언제부터인가, 시간을 공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기억하는 많은 장면들이 사실 '시간'이 아니라 '공간'으로 저장되고 있다는 것을.


아침 햇살이 주방 식탁 끝에 걸쳐 있던 장면


퇴근 후 조용히 샤워하던 욕실의 물소리


주말 오전, 아이가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순간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책을 읽으며 졸았던 휴일 오후


이 모든 건 시간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감정을 담았던 공간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말이
단지 물건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감정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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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면을 통해 감정을 기억한다


기억은 사실 연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정지된 장면’이다.


마치 영화 속 한 컷처럼,
그 장면에는 공간, 빛, 냄새, 소리, 감정이 모두 들어 있다.


우리는 ‘그날의 아침’을 이렇게 기억하지 않는다.
“7시에 일어났고, 7시 20분에 씻고, 8시에 나갔다.”


대신 이렇게 기억한다
“현관 앞에 나가려던 찰나, 아이가 뒤에서 안겨왔던 그 느낌.”


이처럼, 우리는 시간을 이야기처럼 기억하지 않고,
공간과 감정이 얽힌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장면은,
늘 내가 사는 공간, 즉 우리 집이라는 무대 위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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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시간의 얼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었다.
하루를 이루는 시간들이
공간 안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아침의 집은 나를 깨우는 예열 장치일까?
아니면, 나를 재촉하는 소음 덩어리일까?


퇴근 후의 집은 나를 회복시키는 장소일까?
아니면, 다시 시작되는 노동의 공간일까?



우리는 종종 ‘하루’를 계획하면서
공간은 그저 배경일 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공간은 가장 가까이에서
시간의 온도와 감정을 조율하는 설계자다.


아침의 빛이 들지 않는 침실,
너무 높거나 낮은 세면대,
허전한 거실,
수납이 복잡한 주방

이런 작은 구조와 요소들이

우리의 하루를 ‘불편하게’ 또는 ‘풍요롭게’ 만든다.






집은 일상의 가장 잦은 감정이 쌓이는 곳



집은 성격을 닮는다’는 말이 있다.
그건 단지 취향 때문만은 아니다.


집은 우리의 감정이 가장 자주, 그리고 자유롭게 드러나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결국 공간의 분위기를 만든다.


아이에게 짜증을 냈던 부엌


홀로 눈물을 삼켰던 욕실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았던 소파


생일 케이크 초를 불었던 거실


창밖 비를 바라보던 작은 테이블


이런 장면들이 쌓이고 쌓여,
그 집만의 공기와 정서를 만든다.


즉, 집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감정의 아카이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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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감정의 아카이브








나는 오랫동안 ‘공간’을 고민하는 일을 해왔다.


수많은 사람들의 집을 보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그 안에 어떤 감정을 담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흐름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결국 ‘시간’을 기준으로 공간을 사용하고 기억한다는 것.


하루의 루틴, 삶의 흐름, 감정의 반복
이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그 교차점을 따라
감정의 온도를 탐색해보고 싶어졌다.



우리 각자가 어떤 감정으로
하루를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떻게 공간에 남고,
또 그 공간이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되돌려주는지를
함께 바라보고 싶은 시도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바라는 마음이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공간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길 바란다.


평범하고 낡은 집이라도,
그 안의 ‘시간과 감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우리 집’이라는 단어의 무게


‘우리 집’이라는 말에는
참 따뜻한 기운이 있다.
그건 단지 가족이 함께 산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시간을, 같은 공간 안에서 공유하고 있다는 연대감이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에 《집의 표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집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을 품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함께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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