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비차별 그 사이 어디쯤에서
요즘 나의 키워드는 '정리'인데, 이것이 독서의 영역에도 가닿아,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 책들을 꺼내보게 하고 있다. 최근 눈에 들어온 책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였고 책을 읽다 작년 겨울 무렵의 일이 떠올랐다.
평소와 같이 출근길에 나선 아침이었다. 집에서 회사가 가까울수록 더 게을러진다고 했던가- 내 머릿속 출근 시간 타이머는 회사 출근 시간인 8시 정각에 맞춰 아침에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계산했다. 이 말인즉슨, 계산대로 움직였을 경우 회사가 위치한 지하철 역에서부터 뛰지 않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갔을 때 정확히 8시, 운 좋은 날엔 7시 58분쯤 출퇴근 단말기에 사원증을 찍는다는 뜻이다. 여의도역은 워낙 하차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그 전 정거장인 신길역에서 출입문 앞쪽에 내릴 태세를 갖추곤 한다.
그때였다. 난데없는 안내방송이 들려오기 시작한 게.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여의도역에서 장애인 단체의 불법 시위가 발생하여 열차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왜 하필 지금이야...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데.. 오늘 지각 당첨이네ㅠㅠ'
초초한 동동거림으로 기다린 지 오 분여쯤이 흐르고 우선 팀장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팀장님, 지금 여의도역에서 장애인 시위가 발생해서 열차 통행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ㅠㅠ 신길역에 갇혀있어서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ㅠㅠㅠㅠ"
그냥 지금이라도 내릴까 하다가 우선은 좀 더 기다려 보고 있던 찰나, 이어서 주변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팀장님,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팀장님, 제가 지금 신길역에 갇혀 있는데요..."
"팀장님! 제가 카톡 드렸는데 보셨나요?"
열차에 탄 사람들은 지각 위기를 감지하고 너나할 것 없이 각자의 팀장님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휴, 직장인의 삶이란-) 뒤이어 또다시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승객 여러분, 시위가 언제 해결되어 언제 열자가 출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한 번 안내드립니다...."
이런. 그냥 아까 바로 나와서 택시 탈 걸. 여의도로 향하는 신길역 1번 출구에 모여든 인파로 택시를 잡는 것 또한 녹록지 않아 보여 우선 버스정류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빠른 '택시' 포기로 다행히 탑승 대기줄의 앞 쪽을 선점할 수 있었다. 무사히 버스를 타고 조금은 안정된 마음으로 다시 팀장님께 문자를 보냈다.
"팀장님, 지금 신길역에서 버스 타고 가고 있습니다. 15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차 두 정거장을 남긴 그때, 또다시 아차 싶은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의도 버스 환승센터에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하고 있던 것이다. 다행히 시위를 제지하던 경찰 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결국 나의 짜증은 터져버리고 말았고 남편에게 분노의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꼭 출근시간에 시위를 해야 해? 시민들은 대체 무슨 잘못이야. 이건 진짜 좀 너무한 거 같아!!"
쫓기듯이 아침을 보낸 탓인지 하루 종일 피곤한 컨디션으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가는 퇴근길, 문득 궁금해져서 기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2017년 10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신길역 계단 옆 장애인 리프트를 타려다가 추락사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기 위해 출퇴근 시간의 특정역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열차에 타고 내리고를 반복하며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내 편의만 생각하고 비난했던 아침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은 숙연해진 기분과 함께 집에 돌아가던 길에 팀원들에게 그들의 사정이 담긴 뉴스 기사를 공유했다. 그리고 다시 여느 때처럼 출퇴근을 하는 일상으로 돌아와 이 날의 기억을 서서히 잊고 있었는데, 이 책이 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내 준 것이다.
저자는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부당한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것도 시민의 책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민 불복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시민 불복종은 일종의 '말걸기' 행위다. 매우 절실한 형태의 말걸기다. 사안의 긴급함과 중요성이 주목받지 못하고 이해되지 못할 때, 그래서 통상적인 경로를 통해 효과적으로 의견이 전달되지 않을 때 시민 불복종이 사용된다.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효과가 없고, 소수자의 의제에 다수자가 무관심하거나 변화의 의지가 없을 때, 불복종의 방식으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을 모으고 사안에 대해 알리는 것이다. (p.166)
그랬다. 그들의 시위는 일종의 '말걸기'였다. 여전히 그 시위가 정당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막연히 안타깝다고 여기거나 혹은 아예 무관심했던 나 같은 사람들이 이 시위를 통해서라도 이 문제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이 시위는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장애인 지하철 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언급이 나온다.
승객들의 반응은 매서웠다. 시위하는 장애인들에게 "지들 때매 피해 본 사람이 몇만 명이야!"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누가 죽으래?""누가 장애인 되래?"라며 막말을 했다.
바로 이런 다수자의 불관용 때문에 소수자가 다른 효과적인 소통의 통로를 갖지 못하고 시민 불복종에 기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략) 소수자의 '말 걸기'에 다수자가 어떻게 화답하느냐에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시위를 비난할 수도 있지만,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시위에 동참해 함께 변화를 요구할 수도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화답하겠는가? (p.168)
극단적인 시민 불복종의 원인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관용조차 허락하지 않는 우리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차별을 둘러싼 긴장 앞에서, 우리는 '평등 사회'를 지향하는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몰랐다" "네가 예민하다"는 방어보다는, 더 잘 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한다.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차별의 경험을 이야기해주고 경청함으로써 은폐되거나 익숙해져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을 감지하고 싸울 수 있다. 우리가 생애에 걸쳐 애쓰고 연마해야 할 내용을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에서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옮기는 것이다. (p.189)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로 숨겨진 무수한 차별들. 그 차별에 익숙해진 모두는 저자의 말처럼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 테다. 적극적으로 함께 싸울 용기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차별받지 않기 위한 노력이 아닌 차별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하자'는 문장 앞에 나도 모르게 배에 힘이 들어가고 자세가 꼿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