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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아십니까

by 샤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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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를 아십니까’ 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그들의 영업 방식이 조금 세련되었을 뿐이다. 더 이상 도를 아냐고 묻지 않는다. 관심 가질만한 토픽을 가져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사주 한번 보실래요? 등등


예전에 대학생일 때의 일이다. 지하 광장에서 심리학 전공생이라고 소개한 두 사람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렴풋 분위기만 기억나는데 금테 안경을 통통한 사람과 빼빼 마른 사람이었다. 순진했던 나는 그때 막연히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다. 학교 지하 라운지에 자리 잡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 설문지와 볼펜을 건넸다. 얼핏 봐서는 그럴싸해 보였다. 첫 부분에는 그래도 심리학 느낌이 나는 설문지였다. 어떤 상황을 주어주고 어떻게 느끼고 행동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지구가 한 바퀴 도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등등 우주론적인 이야기 같더니 소우주니 대우주니 하는 내용들이 나왔다. 나는 당시 우주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런데도 처음 듣는 내용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곧바로 물었다. 소우주는 뭐고 대우주는 뭐예요?


내용은 기억나진 않지만 그들만의 이론 안에 소우주와 대우주가 있으며 각각의 주기가 있고, 그 주기가 딱 맞는 순간에 무슨무슨 일이 발생한다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어? 내가 모르는 내용을 어떻게 심리학과가…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이 도를 아십니까인 줄은 몰랐다. 만약 지구환경과학과라고 했으면 아 그런가?라고 속았을지도 모른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천문학 팟캐스트를 통해 긁어모은 잡지식으로 눌러줘야지 생각했다. 일부러 대화의 맥락을 학문적인 토론으로 이끌었다. 마침 공강이었다. 두 사람은 나랑 한 시간가량 진땀을 빼고 도망쳤다. 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에 보면 더 이야기 나눠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마 블랙리스트에 올랐을 것이다.


나는 유난히 그런 부류들에게 쉽게 먹잇감이 되는 편이다. 걸을 때도 멍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게 습관이라 그런 거 같다. 아마 외지에서 올라온 어리숙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대화 시도조차 어려운 소위'서울깍쟁이’들 보다는 나아 보인다 생각하는 것 같다. (그분들께 미안하지만 나도 서울토박이다.) 요즘은 유튜브가 보급되어서인지 사람들은 이러한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에 잘 넘어간다. 화술이 매우 정교한 경우, 또는 마음이 힘든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의 판에 박힌 공격에도 쉽게 무너진다. 내 친구도 힘든 시절 그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친구는 그들의 말에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다 끊으려 했고 한동안 포교원으로서 활동하다가 어렵게 빠져나왔다. 몸과 마음이 다 상했다. 다시는 포교당이 있었던 곳 근처로도 가려하지 않았다. 큰 트라우마를 겪고 나온 것 같았다.


이번주에도 잠실역을 지나는데 말쑥해 보이는 여성분이 영문을 아느냐고 물었다. 영문이요? 네 영문이요 우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라고 하잖아요. 그 영문 말이에요. 나는 단번에 도녀군 이라고 생각했다. 대답 없이 꾸벅 목례만 하고 내 갈길을 향했다. 그 친구가 생각났다. 언젠가 이 여성분도 내 친구처럼 빠져나 올날이 올까? 마음이 많이 힘든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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