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김연아 스케이트 선수, 비보이, 그리고 일반인을 데리고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실험의 내용은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기구에 세워놓고 수십 회, 수백 회 돌린 다음 일직선으로 걷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연아 선수는 신예라 그런지 그러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곧잘 출연했던 것 같다.)
평소에 뱅글뱅글 도는 연습을 많이 하는 김연아 선수와 비보이는 돌림판 위에서 바닥으로 내려와도 멀쩡히 일직선으로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몇 미터 흐물흐물 걷다가 땅바닥에 주저앉고 심한 멀미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그러한 실험 끝에는 항상 가운을 입은 의사 선생님이 등장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선생님 왈, 우리 몸에는 회전 감각을 인지하는 기관이 있는데 평소에 격한 회전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우리 몸은 그에 아주 잘 적응한다고 한 것 같다.
멀미에 취약했던 나는 그 영상을 보고 나서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머리를 감고 나서 메탈리카의 커크헤밋이 헤드뱅잉을 하는 것처럼 머리를 사방으로 흔들어 물기를 빼보기로 한 것. 마치 강아지들이 털이 물에 젖을 때 털어내는 식으로. 머리를 사방으로 세차게 흔들다 보면 김연아 선수처럼 격한 회전에 적응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처음 며칠간은 극심한 멀미가 느껴졌지만 며칠 반복하다 보니 상당히 익숙해졌고, 메탈리카 음악을 틀어놓고 리듬까지 즐기는 경지까지 도달했다. 머리 흔드는 것만 따지면 나도 이미 락커였다.
놀라운 점은 정말 그 뒤로 멀미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차를 타든, 시선이 어디로 향해있든 멀미를 느끼지 않았다.
2.
얼마 전 약국에 한 여성분이 오셨다. 어지러움이 너무 심해서 약을 달라고 하셨다. 나는 기저질환이 있는지, 이와 관련하여 진료를 보신 적이 있는지 등등을 여쭈었다. 여성분은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있는데 약을 다 드셨다고 했다. 나는 처방을 받으시는 게 좋다고 말씀드렸지만 주말인지라 여의치 않으면 항히스타민제를 조금 드려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떠올린 것은 수면유도제였다. 어지럼증에 흔히 처방하는 약과 가장 비슷하여 그것을 권했다. 조금 졸리거나 나른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여성분은 다른 약을 찾으셨다. 음 그럼 다른 약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여성분은 휙 나가셨다.
순간 멀미약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아 이것을 먼저 권했어야 했는데. 기민하지 못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피시방에서 게임할 때 어지럼증을 호소했던 친구에게 먹였던 이 멀미약. 이걸 드렸어야 했다. 성분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직접 적용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미숙했던 것 같다. 바보 같았다. 이러면서 하나씩 배워가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