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뇌과학에서 흔히 회자되는 두 종류의 실어증이 있다. 바로 브로카 실어증과 베르니케 실어증이다.
브로카 실어증(Broca's aphasia)은 '운동성 실어증'이라고도 불린다. 이 실어증을 가진 사람들은 문장을 단순화하거나 생략해서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은 잘 이해한다. 핵심은 표현의 어려움이다.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는 데 시간이 걸리고, 단어를 떠올리는 데 애를 먹는다.
반면, 베르니케 실어증(Wernicke's aphasia)은 '감각성 실어증' 혹은 '유창성 실어증'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언어를 구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어 보이지만, 정작 말의 내용은 비논리적이다. 상대방의 말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얼핏 보면 말을 잘하는 것 같지만, 실은 언어의 본질인 '의미 전달'이 무너진 상태다.
일을 하다 보면 발성 자체가 어려운 분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는 말보다는 표정, 눈빛, 몸짓 같은 비언어적 신호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면 속이 쓰린 건지, 더부룩한 건지, 쑤시는 느낌인지 물어본다. 상대는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짓으로 반응하며 의사소통을 이어간다. 이런 식의 대화는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결국 진심이 통한다. 마치 2인 3각 달리기를 하듯이, 한 발 한 발 서로 맞춰가며 대화를 완성해 나가는 느낌이다.
그런데 때때로 말을 너무 유창하게 잘하는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말에는 힘이 있고, 논리도 있고, 심지어 유머까지 곁들여지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에 이상한 끈적임이 남는다. 마치 아무 말도 안 한 것 같은 허망함. 말은 들렸지만, 마음은 닿지 않았다. 그럴 때 나는 속으로 '베르니케 실어증 같네'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 실어증은 아니겠지만, 그 언어의 공허함과 왜곡된 메시지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나는 챗지피티(ChatGPT)를 쓰면서도 받는다. 분명 나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그리고 어떤 방식의 대답을 원한다고 명확하게 안내했는데도, 챗지피티는 종종 그 가이드를 무시한 채 유창한 말들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그래서 나는 어느 유튜버가 알려준 프롬프트를 그대로 써서 명령했다. 앞으로는 출처를 명확히 제시하고, 불확실한 정보는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라고.
챗지피티는 나의 말을 되풀이하며 알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결국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나는 매번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내가 따로 검증해야 하는 수고를 들인다. 그럼에도 나는 챗지피티에게 악의를 느끼진 않는다. 그저 계산된 결과를 출력하는 기계일 뿐이니까. 때때로 이상한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가 아니라, 그저 주어진 조건에서 가장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은 다르다. 말이란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화려한 언변 속에 거짓을 끼워 넣는 사람도 있다. 그 말들은 겉으로는 논리적이고, 친절하고, 따뜻해 보이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알 수 없는 찝찝함이 남는다. 말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진심이 없다. 마치 방음벽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처럼, 말은 전달되지만 마음은 차단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이 사람이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며 나를 흐리려는 걸까? 그 유창한 언어는 단순한 실어증일까, 아니면 전략적 거짓말일까? 챗지피티는 베르니케 실어증을 닮았지만, 그것은 오류에서 비롯된 무해한 왜곡이다. 반면, 사람의 베르니케적 언어는 의도가 담긴 왜곡일 수 있다. 하나는 수리 가능한 오류고, 다른 하나는 성찰이 필요한 기만이다.
우리는 이제 말의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누구나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말의 진실을 가려내는 능력도 점점 더 중요해진다. 나는 말을 듣는 사람으로서, 그 말의 유창함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듣고 싶다. 어쩌면 진실은 유창함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머뭇거림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침묵 다음에 찾아오는 말이 더 믿을 만할지도 모른다. 말은 도구일 뿐이다. 진짜는, 그 말을 시작한 마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