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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y 05. 2020

계단 오르기

부처님 오신 날

엄마가 절에 다녀서 나는 절이 싫었다. 엄마의 종교는 기복이었으니 나는 더욱 유물론을 맹신했다.
남편이 집을 날려먹은 어느 날 친구가 삼천배를 하러 제주도에 간다며 내손을 잡아끌었다. 당시 계단을 한 발씩 내려와야 할 정도로 무릎이 안 좋았다. 이 몸으로 어떻게 절을 한단 말인가, 생각은 했지만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3박 4일간 새벽에 일어나 밤에 잘 때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절을 했다. 너무 아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쉬지 않았다. 조금 느리기는 해도 마음을 다해 절을 했다. 바라는 건 없었다. 오히려 비어 가는 마음이 편했다. 밤에 숙소로 가려면 긴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뒤로 한 발씩 걸어야 했다. 머리만 대면 잤고 새벽예불 종소리에 깼다.
그게 아비라기도라고 했다. 뭔지도 모르면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님이 나를 불러 앉히셨다. 절을 아주 정성껏 하더라고, 오만한 마음을 버리는 수행이 되었을 거라고 했다. 그랬는지 어쨌는지 잘 모른다. 다만 다른 사람 무릎이 바닥에 대이는 것만 봐도 아파하던 내가 그 뒤로 계단을 뛰어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어졌다. 믿거나 말거나다.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가장 좋은 것은 계단이 있다는 것.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를 수 있다는 것. 더구나 무릎에 무리가 가는 내려가는 건 엘이터로 할 수 있다는 것. 매일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간다. 그리고 15층 계단을 오른다. 딱 그만큼. 매일의 루틴. 별거 아니지만 나를 지키는 매일의 운동.


부처님 오신 날이다. 집 근처 절에 점심 공양하러 간다, 맡겨놓은 양. 절을 그리 했건만 여전히 오만한 나는 아무 보태는 거 없이 구하기만 한다. 크리스마스가 그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이듯 부처님 오신 날은 내게 절밥 먹는 날이다, 아직은.
올해는 감사하게 연잎밥을 먹었다.
잊지 않고 계단 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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