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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Aug 20. 2020

박하사탕

어느 책에서 영화 <박하사탕>을 인생영화로 꼽는 걸 보고 한숨을 쉬며 남편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참 좋아하는데 나는 왜 짜증스럽게 기억되는 걸까?”

아마 배우의 과한 감정 연기 탓이 아닐까?

듣고 보니 그랬다. 내용을 떠나서 일단 배우가 내뿜는 과한 슬픔과 분노에서 거부감이 일었다. 주인공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우리에게 전달하기도 전에 이미 배우가 너무 감정에 취해 있었다. 그는 지금 최고의 배우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때는 좀 그랬다.

“맞아. 일단 우는 싫어. 가수도 우는 창법 싫어하고, 영화도 배우가 먼저 우는 거 싫고.”

사실은 영화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보는 내내 마음이 떠버렸다. 

“근데 우는 걸 싫어하는 내가 어쩌다 국카스텐 노래는 좋아할까? 국카스텐 음악도 나 힘들어, 하면서 소리 지르는 건데.”

“그건 록음악이잖아. 락은 슬픔을 표현하는 음악이 아니라 반항 분노가 먼저지.”

사실 이건 몰라서 물었다기보다는 말하고 싶어서 한 질문이었다. 남편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서두를 꺼내 준 셈이다.

“슬픔 자체가 싫지는 않. 락은 슬픔을 슬프다고 징징대지 않고 분출해서 승화시키지. 특히 국카스텐 음악은 ”

“바로 그거야. 징징대는 거 보기 싫어. 영화도 음악도. 우는 건 얼마든지 달래줄 수 있어. 하지만 징징대는 건 아냐.”

공감이라는 건 정말 그랬다. 정말 슬퍼서 우는 건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슬픔을 연장하고 슬픔을 무기로 삼으려는 징징거림은 현실을 직면시켜버리고 싶게 한다.   

“우리 참, 못됐다.”

우리는 똑같은 유형의 인간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참 안됐다.      


영화 취향이나 배우 연기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그릇이 작은 게 문제다.

징징거린다는 건 해소되지 못한 어떤 것이 오래되고 깊어서 손쓰기 힘들 만큼 진행되어 박혀버린 탓일 게다. 그걸 직면시켜버리고 싶어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참을성이 없는 것이다.

진짜 우리 애들이 안됐구나.


하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 돌아갈래, 를 공감하지 못한 것이 더 컸을 것이다. 주인공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한번도 옛날이 더 좋았다거나 어린시절이 그립다거나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때는 어쩌다가 나는 아직 미성년인가 되뇌며 살았고 더 어렸을 때는 삶의 이유를 찾느라 바빴다. 아무리 봐도 내가 태어나야 할 이유가 없는데 왜 나는 세상에 나와야 했을까 고민했다. 

그래서 지금 힘들지 않냐면 그렇지도 않으면서 어린 시절, 아무런 자유가 없던 미성년의 시기에 내 눈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아직 이겨내기에는 너무 여린 감성의 내게 천둥같은 감정의 진폭을 감내하게 했던 그때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한다.  

외로웠다. 삶이 본래 외로운 건 줄은 모르고 나아질 것을 기대했다. 오죽하면 <고향의 봄> 노래를 들으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라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작사가도 어지간히 고향에 그리운 사람이 없구나, 그러니 복숭아꽃 살구꽃만 그리워하지,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러니 나 돌아갈래, 를 외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가 없었다. 공감하지 못해서 가장 저항감이 크면서도 어쩌면 가장 내 밑바닥을 건드린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싫은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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