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Nov 21. 2019

버즘나무

아토피인 그 아이를 위하여

초등학교 교정에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있었어요.

그때는 플라타너스가 아니라 버즘나무라고 불렀는데요,

나무 둥치 껍질이 후루룩 벗겨지는 것이 하얗게 버즘 피는 듯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대요.

알고 보니 그게 우리말이었다지요.

나는 아토피 피부를 가졌어요. 버즘나무보다 더 자주 피부가 벗겨지고 빨갛게 흉이 져요. 나는 그 버즘나무가 참말로 싫었네요. 벗겨지면 하얀 속살이 나오는 버즘나무가 부러웠는지도 모르겠어요.

정문 앞에 커다랗게 서있는 그 나무를 안 볼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으니 괜스레 발로 한번 차주고 지나다녔던 거 같아요.


버즘나무는 껍질이 붙어있을 새 없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컸대요.

아이들은 더운 여름 버즘나무 그늘에서 땀을 식혔을 테지요.

나무 등걸을 쓱쓱 부벼 그 껍질로 올망졸망 머리 맞대고 소꿉놀이도 했을 테지요.

마을 어른들은 이른 저녁 드시고 슬렁슬렁 버즘나무 아래로 모여들었겠지요.

괜스레 나무 꼭대기를 한번 쳐다보고는 넓은 이파리에 이는 바람 재보았겠지요.


중학교에 가서도 더 붉어진 저는 긴소매 속으로 움츠러들었고,

코끼리가죽처럼 덕지덕지 굳어져도 하릴없이 쑥쑥 자라는 사지를 바라보며

내 의지와는 무관한 일들에 대해 생각했지요.    

저런 어쩌나 쯧쯧 혀 차는 소리와 놀라고 징그러워, 피하는 눈길을 받으면서

히잡 여인네들을 부러워도 해봤네요.


그날,

왜 그 길로 들어섰는지,

평소에 안 가던 길목, 초등학교 앞을 지났는데요,

숨길 데 없는 몸뚱이를 보듯

교문 위로 쑥 올라온 커다랗게 자란 버즘나무를 보았어요.

드문드문 들고일어난 나무껍질을 온몸에 달고

나무는 파랗게 이파리를 흔들어대고 있었어요.  


그때,

내 안에 무슨 춤신춤왕이 있었는지,

버즘나무 따라 몸이 흔들리네요.


꽁꽁 싸맨 긴 옷을 벗어던지고

움츠려있던 근육과 관절이 춤을 추었어요.  

이파리에 묻은 바람소리가 음악이 되어주었지요.

춤을 추기 시작하니

쉬지 않고 긁적이는 내 손가락이 내 몸을 벗어나네요.

가려움을 잊고 몸을 느끼네요.

부비고 때리고 긁기만 했던 내 몸을 부드럽게 만지네요.

한 번도 내 손길을 받지 못한 내 몸을 안쓰럽게 만지네요.

나조차도 들여다보기 싫던 내 몸을 따스하게 바라보네요.

샅샅이


춤을 추는 순간,

해방이고 자유고 평화예요.  

더없이 건강한 내 의지를 느껴요.  

버즘나무 따라 내 입이 웃고 있어요.

버즘나무 따라 내 머릿속이 환해졌어요.


한바탕 춤바람이 지나가고,

나는 주춤주춤 다가가

다른 아이들처럼 나무 등걸을 부둥부둥 껴안았어요.

나무껍질인지 내 껍질인지 모를 껍데기들이 마구 떨어져 나가고

바람소리인지 내 안의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쏴아아, 쏟아져 나왔어요.


춤을 춰요.  

이제 나는 춤추는 사람이에요.

저런 어쩌나 쯧쯧 혀 차는 소리와 놀라고 징그러워 피하던 눈길이

오, 세상에, 감탄하는 소리와 놀라고 부러운 눈길로 변했어요.

빨갛고 딱딱한 껍질 덮인 피부가 아닌,

춤추는 내 몸, 움직이는 내 근육, 튕겨지는 손끝과 발끝의 리듬을 봐요.


춤은, 유일하게 긁지 않는 순간이에요.

긁지 않는 순간은 내게 평화의 세상이에요.

평화로운 내가 춤을 추면 보는 사람들도 내게서 평화를 느낀대요.  


어느새 내 몸이

버즘나무 따라 이렇게 많이 큰 줄 몰랐네요.

어느새 내 마음이 버즘나무 따라 이렇게 시원해진 줄 몰랐네요.


바람이 차가워진 오늘,

다시 초등학교 교정 앞에 섰어요.

붉은 천을 한 뭉치 손에 쥐고서.  

뿌리가 얕은 버즘나무가 더 튼튼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나무에 붉은 천을 둘러주었어요.

깊이가 얕은 내가 춤추지 않을 때에도 평화로울 수 있도록

발진 가득한 내 몸을 안아주듯이 나무를 감싸주었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여서 좋은 내가 되어

버즘나무여서 좋은 버즘나무를 올려다보아요.





매거진의 이전글 네 이름이 뭐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