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어릴 때 놀이터도 한번 제대로 데려가지 않았던 남편 입에서 아기 안고 싶다는 말이 나오다니.
우리는 바야흐로 손주가 필요한 나이가 된 것이다.
사회가 변해도 생물학적 나이는 속일 수가 없나 보다.
늙었어, 늙었어.
짐을 옮기거나, 음식을 먹다가도 한 번씩 읊조리던 말에는 그냥 한 귀로 흘리고 말았는데, 아기 안아보고 싶다는 말은 쉬이 넘어가지지 않는다.
뭐든 대충대충 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꼼꼼하다. 정리를 잘하고 계획성 있어서 꼼꼼하게 챙기는 게 아니라, 남편은 무엇을 해야 하면 그것으로 분扮하는 타입이다. 밥을 하면, 순간 요리사로 분한다. 솜씨를 떠나 마인드와 표정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한 번은 이웃들과 고기를 먹고 남은 불에 밤을 구워 먹기로 했다. 모두들 남편의 표정을 보고 놀랐다. 그 순간 남편의 표정이 군밤장수와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남편을 보면서 이런 사람이라면 결혼해도 되겠구나 생각한 순간이 있다. 연애 시절 산에 갔는데 비가 엄청 쏟아졌다. 얼른 텐트를 치고 비를 피했는데, 남편 혼자 그 비를 맞으며 텐트 주변을 삽으로 파서 고랑을 만들어 물길이 다른 쪽으로 흐르게 하는 데 심취해 있었다. 게으른 나에 비해 이토록 부지런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불행히도 그가 분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가정을 꾸리는 남편의 역할이다. 그의 말로는 그런 남편의 상, 아버지의 상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도 드라마로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았을 때 그런 말을 했다. 드라마 보면 아들을 낳을 때 남자들은 나가서 술 한잔 하고 들어오던데... 흠... 무엇으로 분하는 남자보다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남자를 택했어야 했어...
어쨌거나 내가 국카스텐을 좋아한 것도 예술가로 분하기 위한 그들의 집요한 성실성, 집요한 정성, 집요한 의지에 이끌린 것 같다. 물론 내가 본 그들은 이미 예술가였지만, 그들의 과거를 돌려보고 또 돌려보면서 내가 감동했던 지점은 그런 것이다.
아들의 대안학교를 정할 때도 그랬다. 그곳은 어린 시절에는 손으로 정성껏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가장 중요시 여겼다. 함께 수업 참관을 하던 지인이, 무엇이라도 정성을 들이는 것을 가르치는 학교라면 괜찮지 않을까요? 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 한마디에 나는 넘어갔다.
그렇게 ‘정성’이라는 낱말이 주는 의미가 내게는 남다르다. 내가 갖지 못한 지점이어서 더욱 그랬겠지만, 갖지 못한 품성이 그것만이 아닌데 유달리 집착하게 된다.
이야기가 산으로 흘렀는데, 그렇게 무엇으로 분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것을 버거워하기 시작했다. 스테이크를 하다 말고 그냥 찹스테이크를 해서 때우자,라고 한다던가, 우스타 소스를 넣어야 할 것을 데리야끼 소스밖에 없으니 그냥 이렇게 먹자,라고 한다. 늙은 것이다. 아, 늙은 것이다.
정성껏 무엇을 하기에는 이제 힘에 부치는 시간이 왔다. 사회적 나이와 상관없이, 살던 방식으로는 이전 같은 에너지를 낼 수 없는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얼마 전 그런 글을 읽었다. 중국의 한 부호는 중년의 위기를 젊은 아내를 맞이하는 걸로 극복했고, 또 어떤 이는 외국어를 배우면서 극복했다고 한다. 허허...
우리는 무엇으로 이 시기를 극복할 것인가. 과연 우리에게는 무엇이 허락될 것인가.
혀를 차며 만인의 아기, 건후와 벤틀리(슈퍼맨이 돌아왔다)를 보며 빈속을 달랜다. 자신의 결정권이 없는 어린 시절이 함부로 공개되는 것에 대한 문제점에 공감하여 이 프로그램을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열혈 애청자가 되어버리다니, 인생 참,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