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Aug 04. 2021

갱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모임

갱이사를 모집합니다~

친구와 갱년기를 주제로 모임을 갖기로 했다. 동네에서 만나는 동생들이 갱년기를 맞으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데 대답하다 보면 밑도 끝도 없다는 게 계기였다. 이왕이면 동네 언니를 잘 둔 덕에 갱년기를 미리 준비하고 가볍게 지나갈 수 있게 돕고 싶었다. 적당한 책을 권할까 해서 찾아봤지만 마음에 드는 책이 없었다.       

왜 없지? 우리가 못 찾는 거겠지. 설마 갱년기 책이 없겠어? 음...진짜로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이야기해보자. 비슷한 시기에 갱년기를 아주 세게 앓은 친구와 나는 이 기회에 괜찮은 언니 노릇을 해볼 생각이다.


나의 갱년기로 말할 것 같으면 덕질로 시작해서 덕질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통 사고로 시작해서 덕질 책까지 냈으니까. 그 말은 현실세계를 외면할 정도로 힘들었다는 얘기다. 이제 갱년기가 끝났나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떤 증상으로 온다고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질풍노도(이 단어는 사춘기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는 끝난 것 같다.

공자님 말씀대로 불혹이니 지천명이니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인생을 나이로 나눠서 본다면 40대가 가장 사회적 활동이 왕성한 것 같다. 성과의 측면이나 사회적 지위로서나.  

주로 주부로 지내온 나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거의 집순이로 살아온 다른 시기에 비해서 40대는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학부모 활동도 하고, 지역에서 자리 잡으면서 지역 활동도 했다. 회사인들도 그럴 것이다. 어떤 지위나 역할이 주어진 경우에는 당연히 그럴 것이고, 주어지지 않은 이들도 어떤 측면에서든 목소리 높이며 살았을 것이다. 40대쯤 되면 자신의 소신이 가장 확고한 시기이며 거칠 것이 없으니까.  

20대는 자아가 확고해지면서 당돌해지지만 경험이 없다. 30대는 경험치도 어느 정도 쌓이고 유연해지기도 하지만 닥친 일이 너무 많아서 일하느라 바쁘다. 40대에는 자신이 처한 처지와 자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기인 것 같다. 어려움이 있어도 그걸 돌파할 힘이 있다.  

 

40대가 되면서 짧게 머리카락을 잘랐다. 파마나 염색, 또는 머리스타일의 변화 없이 내내 커트를 하고 다녔다. 그 머리 스타일은 내 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었다. 좋은 쪽으로 말하자면 군더더기가 없어진 것이다. 항상 생각이 너무 많은 게 흠이었는데 40이 되면서 단순해졌다. 식당에 가면 뭘 먹을지도 결정 못하던 내가 의견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나쁜 쪽으로 말하면 사회에서 말하는 아줌마 본성이 드러났다고나 할까. 부끄러움이 없어졌다고 말하고 약간 뻔뻔해졌다고 읽히는, 거칠 게 없는 그런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런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했고 내 인생에 가장 찬란한 시기를 보냈다고 말할 수 있다.

쭉 그렇게 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내게 갱년기는 완벽하게 사회적 자아를 잃는 방식으로 왔다.

어느 날, 가만히 앉아서 비 오는 마당을 내다보고 싶었다. 마당 따위 없는 빌라에서 살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 처럼 비 오는 마당을 보고 싶다, 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점차 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마음에 딱 드는 갱년기 책은 없지만 그래도 갱년기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찾았는데, 사회적 자아의 시기가 끝나고 개인적 자아의 시기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그랬다. 의미를 두었던 거창한 삶의 목표나 사회적 가치 같은 것들이 허망하게 느껴지고 나는 누구이며 내 삶은 무엇인지, 굳이 살아야 하는지 까지 의심되었다.

다행히 덕질을 하면서 행복이란 게 별거 아니고 좋아하는 덕주 쳐다보는 거, 덕주에 대해 수다 떠는 거, 그런 소소함으로 다시 오늘을 사는 거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좋아하는 일하면서 살았지만, 그래서 잘 살았다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지금껏 뭐했나 싶은 회한도 있다. 특히 50대는 사회적 자아가 만들어주는 명예나 지위 등을 내려놔야 하기 때문에 더욱 허망함이 앞서는 것 같다.      

갱년기를 몹시 아픈 것으로 겪은 또 다른 친구가 있다. 다행히 큰 병은 아니지만 온몸에 관절통이 왔다. 너무 애쓰고 살아서 그런 면도 있지만 믿고 따랐던 선배의 죽음으로 충격이 컸다. 평생 바라보던 눈앞의 산이 허물어지는 것을 본 것이다. 가치관이나 존재적 의미로나 모두 다.  

갱년기라는 특징을 아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갱년기는 손에 쥐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해야 하는 것과 같다.

더 이상 소중하지 않은데 이전과 똑같이 회사에 나가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가족을 만나야 한다. 내일 아침 눈을 뜨지 않아도 괜찮을 거 같은데 눈은 떠지고 그런 마음에 대한 죄의식도 둔감해진다. 그럼에도 살아지는 시간들...      

그 친구는 곧 낫겠지?라는 질문을 계속했다. 낫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커서 오히려 완치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그 친구의 불안은 낫고 싶다가 아니라 낫지 않아서 회사에 못 가면 어쩌지? 돈을 못 벌면 어쩌지? 에 머물러 있었다. 사실 그 말은 세상에 방해가 되면 어쩌지? 자식에게 방해가 되면 어쩌지? 와 같은 두려움이다.

우리 또래와 노후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스위스에 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나없이 오래 살 마음이 없으며 하루빨리 자식들에게 짐 지우지 않고 깔끔하게 갈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노화의 원인을 찾아내고 죽음의 병이었던 암도 완치하는 등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의학은 오히려 우리에게 저주처럼 여겨진다.       


가치 있고 쓸모 있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던 젊은 날들의 가치관은 쓸모없어지는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안고 살아갈 수 없다. 50대를 지나 60대, 70대... 점점 우리는 쓸모없어질 것이고 점점 누군가의 보살핌 없이는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갱년기는 그런 우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시기가 아닐까. 쓸모없는 것들이 적당히 섞여야 진짜 삶이 풍성해지고, 생각보다 그런 쓸모없는 것들이 더 큰 행복을 주기도 한다는 것,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경험하는 기회인 것 같다.

심하게 몸이 아프면서 몸을 잃지만 돌봄을 받(을 줄 알게 되)고, 심하게 마음을 앓으면서 관계를 잃지만 고독을 배운다. 닫힌 문 뒤로 새로운 문이 열리면서 작고 빛나는 구슬들을 만지작거리며 웃고 기뻐하는 나를 만나는 거다.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이 가만히 있어도 괜찮다. 그렇게 자신과 잘 노는 내가 된다.

그런 경험은 개인적 자아, 자신을 잘 돌보고 달래는 시간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게 꽤 괜찮은 삶의 방식임을 알게 되고 익숙해지면 이후의 노년 긍정하게 되는 것 같다. 다행히 갱년기의 다양한 증상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고, 다시 1학년이 된 것 같은 몸과 마음이 돌아온다고 한다.

 

나는 덕질을 하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고독을 누리고 즐기면서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고독은 노년을 버틸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여서 최고의 아이템을 손에 쥔 게이머처럼 든든하다. 또 덕질을 하면서 그림과 글을 쓰게 된 것은 그다음으로 아끼는 아이템이 되었다.  

무엇보다 덕주를 보기 위해 더 살고 싶어졌다(참 별 거 아닌 이유지만, 아무리 별거 아닌 것 같은 이유라도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가). 나 자신이 점차 쓸모없어져도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그 소소한 웃음을 위해 내일도 눈뜨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날, 나 자신이 기특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삶에 있어 정말 소중한 것은 바로 이런 것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알았다. 우리 나이가 늙으신 부모를 건사하느라 힘든 시기여서 더욱더 자식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마음먹지만, 사실은 내 부모가 하루하루를 징그럽게 여기며 악다구니로 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만일 내 부모가 한순간 한순간을 빛나게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가 그토록 삶을 적당한 때 끝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씩 갱년기가 감사하다. 갱년기가 없었다면 여전히 바쁘고 빠르게 거창한 것을 쫓으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한 번쯤 살아온 삶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래도 되나 싶게 과감하게 말이다.

많이 아프면 아픈 대로 내 몸에 익숙해져야 하고, 많이 두려우면 두려운 대로 내 마음에 익숙해지려 한다. 내가 왜, 라는 질문을 내려놓고 그런 자신을 인정하면서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것도 당연한 게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한다. 다시 1학년 같은 날들이 시작되었을 때 나를 잘 달래고 돌보던 마음을 꺼내어 거울처럼 들여다보며 살아야지.  


쓰고 보니 갱년기는 '삶의 한가운데서 한번 쉬어주는 휴식 시간'인 거 같다. 지친 나를 잠시 쉬게 하고 다시 뜨개질을 시작할 힘을 비축하는 시간.

그러니 저와 함께 갱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을 시작해보지 않으시렵니까.


작가의 이전글 어제 만난 지인이 코로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