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살게 하는 이유

피어나라 갱년기

by 천둥

보부아르는 <노년>에서 “삶은 스스로 제 문을 닫는다. 그 무엇도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자신은 아직 한창인데, 무엇이든 할 수 있는데, 경력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내쳐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부아르처럼 어떤 사람들은 갱년기가 되어도 아직 기력이 남아돌아 더 일하게 해 달라며 자신을 입증하는 데 여념이 없다. 더 이상 일하기 어려운 나이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은퇴하던 때와는 달리 몸은 멀쩡한데 사회가 정한 은퇴 시기가 되었으니 그만 나가 달라니,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기력이 남아돌다니,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몸이 먼저 너는 노인이야 외치는 이들(바로 나 같은)의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부터 하나씩 기울어가고 있다. 눈치 채지 못할 뿐이다. 몸과 마음이 일치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빨리 자기 옷을 입는다. 골골 팔십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후배 정안은 무릎이 안 좋아 한동안 병원에 다녔다. 이제 조금 안정이 된 것 같아 여행을 가서 숲길을 조금 걸었다. 한 며칠 지켜봐도 괜찮은 것 같아 안심을 하려는 찰나 신호가 왔다. 인대는 아작이 났고 의사는 일상생활도 삼가라고 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한 것 같지 않은데 억울했다. 평소처럼 사는 것도 조심스러운 나이. 절대 어제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이 어제와 같지 않은데, 하던 대로 어제처럼 살면 탈이 나는 게 당연하다. 다행히 이런 시간들은 오래지 않아 익숙해진다. 그 시간을 지나올 때는 왜 그런지 답답하고 속상하고 불안하지만, 어느새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유연해진다. 팽팽한 고무줄을 느슨하게 만들려면 마구 당겨서 길을 들이듯이 갱년기는 몸과 마음을 끝까지 데려갔다가 슬슬 내려놓는 것 같다.

아픈 것에 집착하면 병원을 순례할 수밖에 없다. 남들이 좋다는, 전문가가 권하는 대로 살던 시기는 끝났다. 아주 개별적인 ‘나’의 몸에 맞는 것을 찾아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나를 위주로 나에게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내 몸에 한껏 귀 기울이고 세심하게 어루만져주고 하나하나 챙겨줘야 한다. 쌀이 소화가 잘되는지 현미를 먹어도 소화가 잘되는지, 검정콩이 좋은지 병아리콩이 좋은지, 밤에 일찍 자는 게 나은지 잠깐씩 낮잠 자는 게 나은지 살펴야 한다. 내 몸에 맞는 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하찮다는 마음이 조금씩 옅어진다. 원래 쓸모없는 것들이 어여쁜 거라는 깨달음도 생긴다. 그러다 조금만 방심하고 눈을 돌리면 몸은 바로 신호를 보낸다. 나를 봐, 네 배꼽이 하는 말을 들어봐, 네 어깨를 털고 겨드랑이를 열고 발가락을 당겨봐. 그래, 그래. 알았어. 배꼽에 두 손을 모아 올리고 머리부터 발가락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쓰다듬어줄게. 주변이 시끄러울수록 두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고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몸은 일상을 되돌려준다. 몸을 소중히 하면 일상도 소중해진다.

나이 든 사람의 지혜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농경기 사회도 아니고 격변하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과 기술이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으니 살아온 경험이 뭐가 그리 중요하랴 싶었다. 게다가 나이를 먹는다고 절로 우주를 꿰뚫는 지혜를 가지게 된다면 꼰대들은 왜 생기겠나 말이다. 그럼에도 찾아 헤맸다. 나이 든 사람의 존재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고, 그것은 지혜일 거라고. 믿지 않으면서도 믿고 싶었다.

헤르만 헤세는 <어쩌면 괜찮은 나이>에서 “품위 있게 늙어가고 우리 나이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것, 지혜를 갖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영혼이 육신에 앞서거나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삶의 역경에 처하게 된다. 혹은 질병에 걸렸을 때 나타나는 뿌리째 흔드는 두려움이나 근심, 내면적 정서의 혼돈이 생긴다. 아이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울거나 약한 면을 내보임으로써 삶의 균형을 가장 잘 찾을 수 있다. 그런 것처럼 역경이나 두려움에 대해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자세를 갖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더 늙어서가 아니라 지금, 아직은 회복이라는 게 가능한 갱년기에 고무줄을 늘여놓아서 탄력은 조금 떨어질지라도 더 느슨해지고 더 유연해지라는 게 아닌가 싶다. 끊어지지 말고. 어려서는 단단해서 부러지려고 들었다. 아무 때고 자신의 단단함을 과시했고 곧은 거라 믿었다. 그게 젊음의 상징이었고, 난 어른들처럼 변하지 않을 거라고 오기를 부려야 멋있어 보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조금 부러져봤자 다시 굳어지고 단단해졌으니까. 변하는 게 아니라 휘어지고 있는 거라는 걸 몰랐다.


몸이 먼저 느슨해지면서 마음도 느슨해진다. 허용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되고 순응하게 된다. 느슨함은 때로 나약함으로 드러날 때도 있지만 낡은 것은 아니어서 대체로 포용력으로 이어진다.

아픈 것도 인생이다. 아픈 시간들을 살면서 멈춘 것 같은 그 시간들을 뺀 나머지만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시간들 모두가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알겠다. 쓸모없는 몸이라는 자기 인식이 오히려 존재의 존엄성을 깨닫게 해 준다.

아파야 몸을 인식하고 들여다본다. 내 몸이 여기 이렇게 나를 떠받치고 있구나, 자각한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각각의 용도와 그 어우러짐과 균형의 중요성을 알고, 내 몸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된다. 먹는 것, 씹는 것, 소화되는 것, 잠자는 것, 생각하는 것 등등 저절로 이루어지던 일들이 이제 내가 애써야 가능해지면서 나의 의지와 나의 동작 하나하나가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아픈 몸을 겪고 나면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억압에 민감해진다. 채사장은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에서 "통증을 통해 세상과 만난"다고 했다. 개인적 통증은 간접적으로 세상의 통증도 이해하게 한다. "나의 고통은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져 머나먼 타자에게 전달되고, 세계의 고통은 거대한 이야기로 정리되고 다듬어져 나의 영혼을 일깨운다." 고통으로 나의 감각을 확장되는 것, 그것이 지혜로구나, 깨닫는다. 두려움을 알고 필멸을 받아들이고 나면 더 용감해지고 덜 주장하고, 더 간절해지고 덜 가지고, 더 민감해지고 덜 고발하고, 더 분노하고 덜 울고 내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부러지기보다 휘어지는 법을 드디어 알게 된 것이다.


정안은 더 늘어진 고무줄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세상에 “경탄할 일은 남아있지 않다”라고 투덜거리던 보부아르도 10년이 지난 후 다시 여행을 즐기며 “나 자신의 존재도 잊어버”릴 만큼 평화로워진다. 자신감 넘치던 그녀가 갱년기를 겪으며 겸손해진 것이다. 멈춰야 내밀하게 알맹이가 쟁여진다.

늙어가는 것도 인생이다. 그동안 앞서거나 뒤처졌던 내 영혼이 육신에 가 닿은 후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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