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Apr 28. 2022

자, 이제 물을 마시고 글을 써보도록 해라

“얘야, 너는 할 일이 아주 많단다. 그러니 너 자신을 그만 동정하거라. 자, 이제 물을 마시고 글을 써보도록 해라.”
<영혼의 집> 중에서.   
   

몸 안에 글이 고인다.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흔들리다가 마중물만 남기고 쪼르르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글을 정갈하게 담기 위해 그릇을 만들고 닦고 채비한다. 매일 초심으로 돌아가 일상을 꾸리고 많이 읽고 자주 걷고 잘 자려고 애쓴다. 그러다 보면 사나흘, 때로는 일주일 후면 하나의 글이 정리되어 나온다.      


한동안은 흘러넘치는 글을 받아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안에 그렇게 많은 글이 고여 있었나 놀라면서 받아 적었다. 매일 아침 책상에 앉기가 무섭게 새로운 글이 흘러나왔고 또 쓰고 싶은 글들이 밀려올라와 해야 할 일상마저 미뤄야 했다. 흘러넘치는 글을 브런치에 마구 쏟아부었다. 쏟아진 글들이 흘러가다 웅덩이를 만들기도 하고 증발해버리기도 했지만 아직은 내 계정에 남아 촉촉한 수증기를 뿜어 올리고 있다. 천천히, 다시 정리하는 중이다.       

하도 집에만 칩거하고 사니까 주변에서는 이런저런 제안을 했다. 놀러 가자는 달콤한 유혹부터 관심을 끌만한 새로운 프로젝트, 좀 쉬라는 걱정까지. 그 어느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 안에 차오르는 글을 어떻게든 담아내야 했고 그게 가장 편하고 가벼워지는 일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어떤 글은 한숨도 쉬지 않고 그대로 써 내려가기도 했고 어떤 책은 한꺼번에 목차부터 내용까지 다 떠올라서 숨 가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내 능력 밖의 일이라 떼어내려고 기를 썼지만 집요하게 따라다닌 글도 있다. 결국 1년이 넘게 고치고 또 고쳐 비로소 꼴이 나기도 했다.


마음이 힘들었으니 당연히 고통의 언어가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잊고 있었던 즐거운 순간이 먼저였다. 실컷 웃고 추억이라는 게 얼마나 따뜻한지 깨닫고 나니까 살만해졌다. 살만해지니까 숨어있던 한숨이 울음이 아니라 언어로 방울방울 맺혔다. 언어는 남았지만 내 안의 한숨은 흩어지고 사라지고 있다. 가끔 적절하게 이름 지어진 그 언어가 소환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괜찮다. 그만 동정하게 된다.       

남의 글도 눈에 들어왔다. 사람 사는 일을 하면서 사람 사는 글을 보지 않았다. 세상 만드는 글만 눈에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타인의 삶이 내 삶과 다르지 않다는 걸, 또 타인의 삶이 내 삶과는 사뭇 달라서 삶이라는 게 얼마나 다층적이고 무한하며 뚜렷하고 끈질긴 모양새를 갖는지 깨달았다. 내 글에 내 삶의 알맹이가 담기게 되면서 타인의 글도 한 주체로서 온전하게 다가온 거다. 남의 글이 좋은 건, 글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다양한 서사의 사랑을 알게 되어서다. 결국 글을 쓰게 되었다는 건 사랑이 고갈되고 바닥을 드러냈기 때문인데, 그동안 글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았다는 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가. 어쨌든 글을 쓰지 않아도 살만했다는 거고, 이 지독한 사회에서 살만했다는 건 복 받은 일이니까. 허겁지겁 시를 읽고 허겁지겁 음악을 듣고 허겁지겁 글을 쓰는 일은, 그래서 슬프다.        



이 모든 게 내 의지가 아니다. 몸이 시키는 일이다. 인간의 행위란 모두 자신이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니체는 “사악함이 약함보다 더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죄악이 있는 곳에는 또한 거대한 활력과 거대한 힘에의 의지가 있으며, 결과적으로 “자기 극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라고 했다. 위험할지라도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악한 정념을 근절하는 자에게 적개심을 느낀다.”라고 했다.

몸은 본능적으로 인간이 되기 위해 의지를 가진다. 먼저 귀가 열린다. 마음이 동할 계기를 만들어내는 거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는 책 제목처럼 하늘 아래 새로운 말이 뭐가 있겠는가. 이미 다 들어본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배운다. 하지만 마음에 꽂히는 순간은 따로 있다. 그 말을 계기로 우리는 안 하던 짓을 한다. “악한 충동을 없애버린다고 해서 선이 남지는 않을 것이”이고 “선 역시 사라지기 때문”에 몸은 충동대로 행동한다. 몸을 믿고 따르는 것은 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히 타인의 글을 읽고 사랑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사랑을 품고 글을 쓰면서 사랑할 힘이 생겼다. 이제 이전의 글을 다듬으며 하나의 인식이 되게 하는 일이 남았다. 받았으니 나도 뭔가는 해야지.  

          

어제 글( https://brunch.co.kr/@toddle222/488 )을 보고서 학인(글 쓰는 사람 은유는 함께 글을 쓰는 사람들을 학인이라 부른다. 나도 따라 하기로 했다)이 전화를 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

조금 놀랐다. 아직도 글에서 나를 드러내기를 저어하고 객관화시키려고 애쓰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나 보다. 글은 안부요, 편지요, 시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보내는 답장이다.

응, 심경의 변화가 있어. 조금씩 투명해지고 있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고마워, 키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것을 탐하는, 탐하지 않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