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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Sep 05. 2022

비 오는 날 대추나무

아파트에서 즐기는 사계


상상 이상의 태풍이 온다고 한다. 무섭다... 내일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지만 오늘은 오늘의 삶을 살기로 한다.           

 

매일 걸어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으로서 한 며칠 비가 오락가락하면 몹시 불안하다. 걷기를 포기하고 계단을 오르기로 한다. 비 올 때나 눈이 올 때, 너무 추울 때, 심하게 바람이 불 때, 특히 코로나로 아무 데도 가지 못할 때 계단은 아주 괜찮은 운동장소가 되어준다. 지붕은 있지만 외벽은 열려 있어 공기 순환도 잘 되고 딱히 사람들의 시선이 주목되지도 않는다.

오를 때는 가슴을 바짝 세우고 걸어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는 반드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내려오는 자세가 무릎에 치명적이니까젊어서 겁도 없이 지리산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무릎이 다 망가졌다. 바윗길을 터덜터덜 걸은 탓이다. 20대 후반부터 거의 20년을 관절환자로 살았다. 다행히 뒤늦게나마 특별한 경험(그 이야기는 요기로~https://brunch.co.kr/@toddle222/245)을 통해 다시 쌩쌩해졌다. 쌩쌩해졌지만 이제는 무릎을 조심해야 할 나이가 되면서 다시 조심조심 살고 있다.


어쨌든 아파트는 계단을 오르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다. 15층이라는 적당한 높이와 엘리베이터를 갖추었으니. 러닝머신 같은 도구보다 훨씬 낫다. 집에서 러닝머신을 사용한 적이 있다. 소화가 안되던 어느 날, 속이 답답해서 러닝머신 위를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답답한 체증이 내려가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밖으로 나가 걸으니까 대번에 트림이 나오고 속이 시원해졌다. 그 뒤로 러닝머신 위에는 짐만 쌓였다. 결국 이곳으로 이사 올 때 러닝머신을 없애버렸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내게는 러닝머신보다 좋은 계단이 생긴 거다.    

 

꼭대기에 오르면 멀리 산도 한 번 더 쳐다보고 하늘도 올려다본다. 하늘은 언제 보아도 좋지만 노을이 지는 순간이 가장 좋다. 이왕이면 노을 지는 시간에 맞춰 오르면 기대감을 안고 오를 수 있다. 노을은 언제나 그 기대감을 꽉 채워준다. 비 오는 날에도 노을은 역시나 최고다.

우리 집은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어서 톨게이트를 향해 달리는 차들을 볼 수도 있다. 조금 늦은 시간에는 야경을 보는 것도 꽤 그럴듯해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버튼 누르는 것도 잊고 한참 멍 때리곤 한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일은 가급적 하지 않는다. 딱히 고공 공포증이 있지는 않지만 어릴 때처럼 아랫배가 간질간질해지는 것이 재밌지가 않다. 하지만 그 느낌 아니까 살짝 굽어보며 맛만 보기도 한다.    

  

15층을 오르는 것으로 운동 끝, 하고 들어가는 날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리도 풀 겸 아파트를 두어 바퀴 돈다. 우산을 들고 바짓가랑이를 조금 적셔가면서 걷는 것도 긴 무더위에 지쳐있던 심신에 나쁘지 않다. 빗방울에 젖은 꽃잎을 보는 것도 좋지만 이 계절에는 단연 대추나무 보는 재미가 제일이다. 의외로 아파트에는 과실수가 많다. 봄에는 매실이나 살구 앵두 등이 대표적이고 가을에는 감 모과 꽃사과 은행 등이 있다. 추석을 앞두고는 단연 대추나무다. 아직 알이 작고 파랗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다 익은 거다. 맛도 들었을 거다. 한두 개 따서 먹어보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아파트 과실수는 소독약을 계속 뿌려대기 때문에 먹기에 적당치 않다.


어릴 때 집에 대추나무가 있었다. 그때는 마당이 있는 집에는 대부분 대추나무를 심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제사상에 오르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집에도 다 있는 대추나무를 유별나게 기억하는 이유는 한 친구 때문이다. 그 애가 대추를 좋아했다. 둘이 우리 집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대추를 따먹으며 해가 지도록 속살거리다가 그 애 집에 데려다주고 올라치면 다시 우리 집에 데려다주곤 하던 단짝 친구. 엄마가 추석에 쓸 대추를 다 따먹는다고 지청구를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아무리 따먹어봤자 대추나무의 대추는 끝도 없이 달려있는 거 같은데 엄마는 괜히 그런다며 계속 따먹었다. 요즘 대추는 알을 굵게 하고 당도도 높게 개량했다는데 씨앗 빼고 나면 별로 먹을 것도 없는 걸 갉아먹던 그 맛을 따라갈 순 없다. 

대추가 빨갛게 쪼그라들 무렵, 우리는 절교를 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바지 주머니에 말라비틀어진 대추를 만지작거리던 손의 감각이 아직 남아있다. 다행히 그 친구는 지금도 나의 베프다. 우리는 대추를 볼 때마다 빛나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대추 한 알>이라는 시가 걸렸을 때 우리는 누구보다 반가웠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라니. 대추에 그토록 많은 것들이 담긴 줄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의미의 것들이 담겨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나무에 달린 열매는 무엇이든지 그렇겠지만 대추는 유난히 윤이 난다. 나뭇잎도 반짝반짝 윤이 난다. 옛날 아빠들의 구두 앞코가 생각나는 반짝임이다. 광이 나도록(여기서는 꼭 광이 나도록, 이라고 말해야 한다. 빛이 나도록이 아니라) 닦은 구두 앞코처럼 반들반들 윤이 나서 햇살이 부서지면 눈이 부시다. 나뭇잎만 보고 나무를 못 알아보는 편이지만 대추나무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비가 와도 대추나무는 빗방울에 반짝인다. 나뭇잎도 비에 젖은 채 반짝인다. 


내일, 무서운 태풍에 대추도 나뭇잎도 무사하면 좋겠다. 나도 이 비가 그치고 햇빛에 반짝이는 대추를 보며 웃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추석 때 대추 올라간 차례상을 보며 웃었으면 좋겠다.

아직은 상념에 젖는다. 빗줄기가 바람에 날려 얼굴이 따갑기는 해도 계단을 오르고 하늘을 보고 대추나무를 본다. 아직은. 발 우리 오늘 밤 무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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