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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Oct 01. 2022

풀벌레 소리 vs 귀뚜라미 소리

아파트에서 즐기는 사계


9월의 마지막 날, 우리 아파트 공원에서는 작은 축제가 열렸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코로나가 끝나고 나면 1년 내내 캉캉 춤을 추는 축제가 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종식은 어려울 거라고 전문가들은 말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으로는 너도나도 캉캉, 콩콩 신나게 춤을 출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꿈꾸었던 것 같다. 캉캉 춤은 아니지만 어쨌든 계속 축제가 열리고 있다. 시 단위로 구 단위로, 도서관에서 미술관에서 복지관에서, 봄이라서 여름이라서 가을이라서 축제를 연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 아파트에 아이들이 렇게 많은 줄 몰랐다. 할머니들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걸 처음 봤다. 음악 소리만큼이나 아이들의 함성 소리도 컸다. 하늘이 높은 만큼 비눗방울도 높이 날았다.  

돗자리에는 뽑기 기계에서 나온 게 분명한 인형들과 아이를 위해 만들기 시작했을 알록달록한 머리띠와 머리핀, 작아진 아이 모자, 색색의 스카프가 직접 담근 깻잎김치와 나란히 늘어져있었다. 뭐라도 하나 사서 경품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살만한 것이 마땅치 않아 두 바퀴째 돌아보기만 하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맨드라미가 붉게 타오르는 가을을 걸었다. 모과나무에 모과가 주렁주렁 열려있고 감나무에 감이 조랑조랑 달려있다. 모과는 아직 익지 않아 새파랬다. 나뭇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발견해낸 것이 스스로 기특했다. 감나무의 감은 노랗게 익어 멀리서 봐도 눈에 확 띄었다. 조금 지대가 높은 곳이어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데, 눈이 시원해졌다. 가을은 눈으로 먼저 오는구나, 탄성이 나왔다.


예기치 못한 발견도 있었다. 풍선초였다. 바로 우리 동 화단에 있었는데, 나무에 걸려있어서 여태 몰랐던 것 같다. 항상 풍선초가 피던 화단에는 여주꽃이 피었고 열매까지 제법 열렸다. 올해는 풍선초를 보지 못하고 지나가나 보다 생각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조금 더 하늘을 보며 걸어야겠다.



아직 연두색인 것도 있지만 갈색으로 익은 것도 있다. 손으로 비비자 까만 씨앗이 나왔다. 보통은 두 개씩 들었지만 한 개나 세 개 들어있는 경우도 있다. 언제 봐도 너무 신기하다. 완벽한 구에 완벽한 하트가 새겨져 있다. 자연은 상상 이상으로 완벽한 모양을 갖추고 있다. 꽃잎의 배열만 봐도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어서 완벽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다. 그래야 개체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 과연 풍선초의 씨앗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어떤 이유로 완벽한 하트 모양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기적인 유전자>식으로 이해해보자면, 풍선초가 풍선초로 살기 위해서는 오직 하트 모양으로 생겨야 했을 것이고 내가 나로 살기 위해서는 오직 지금의 내 모습으로 태어났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최선의 나일 테니까. 그래, 나는 최선이다. 아니 아니, 그건 아니고 나로서는 최선이다. 그럼 됐지.

     

어둑어둑해지자 가을의 전령이라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났다. 뚜르르르르르 길게 내뱉기도 하고 뚜르뚜르뚜르 짧게 내뱉기도 한다. 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소리를 낸다고 하니까 내뱉는 게 아니고 울음소리도 아니겠지만 왠지 그렇게 말해야 맛이 난다. 아마도 짝을 찾을 때는 길게 소리 내어 멀리 들리게 하는 거고 짝이 있는 경우는 짧게 속삭이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들으니 길게 뚜르르르르 내뱉는 소리가 더 처연하게 들린다. 귀뚜라미 소리말고도 다른 소리가 있는 듯한데 전혀 모르겠다. 내게는 그저 풀벌레 소리다. 역시 가을밤은 풀벌레 소리지, 라며 가을을 귀로 맞이한다.


그럼 오늘은 고즈넉한 가을밤 정취를 물씬 풍기는 풀벌레 소리에 대해 글을 써볼까? 아파트에서 즐기는 사계라고 해놓고 나무나 꽃같은 시각적인 부분만 써왔으니 이번에는 청각에 대해 써보는 것도 좋겠다. 

가만있자, 풀벌레 소리는 여름밤을 상징하지 않는가. 여름방학 때 평상 위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며 풀벌레 소리를 듣는 거 말이다. 직접 경험한 적은 없다 해도 영화나 만화책 등에서 그런 장면을 수없이 보아왔을 테니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때는 어떤 소리가 났더라? 바로 얼마 전 여름에 들었을 풀벌레 소리를 기억해내려고 애써보았다. 아무리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은 오로지 귀뚜라미 소리만 귀에 착 감긴다.

그냥 귀뚜라미 소리에 대해 쓸까? 그래서 곰곰 생각해봤다. 내게 귀뚜라미 소리에 대한 추억이 있던가. 아니면 귀뚜라미에 대한 책을 좀 찾아봐야 하나? 가을만 되면 화분에서 귀뚜라미가 튀어나왔다. 놀라서 얼른 잡아 내보내도 또 다음날이면 귀뚜라미가 나타났고, 결국 화분을 밖으로 내보낸 후에야 귀뚜라미와의 동거를 마칠 수 있었던 아름답지 못한 기억뿐이다. 사실 나는 귀뚜라미가 무섭다. 바퀴벌레만큼이나. 돈벌레도 별로 안 무서워하고 심지어 지네를 보고도 안 놀라는 사람인데 귀뚜라미는 어디로 튈지 몰라 무섭다. 소리가 주는 안식을 추억이 깨 먹었다. 머릿속을 비우려 아파트를 두어 바퀴 더 돌다가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물었다.


풀벌레 소리, 하면 뭐가 떠올라?

시골마당

또?

평상, 달

또?

메뚜기 구이.

그럼 귀뚜라미 하면?

귀뚜라미? 음... 와, 근데 지금 딱 메뚜기 구이 해먹을 철인데.

아, 역시 도움이 안 된다. 방으로 들어와 창작 벗들에게 톡을 보낸다.

     

여러분, 풀벌레 소리 하면 뭐가 떠올라요?

고요하고 캄캄한 밤

여름밤

시골길

황금 논

시골 동네

가로등     


그럼 귀뚜라미 소리는요?

지하주차장...     


아니, 여러분? 귀뚜라미도 풀벌레거든요? 음... 우리는 참 비슷한 기억을 나누며 사는구나. 그렇담 좋은 걸로. 가끔은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저 가볍게 누리는 거다. 가볍고도 편안하게 10월의 가을을 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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